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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387
한자 湖洛論爭
영어음역 Horak Nonjaeng
영어의미역 Horak Controversy
이칭/별칭 호락논변,인물성동이논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오영

[정의]

조선 후기 기호 지역에서 일어난 심성(心性)에 관한 학설 논쟁.

[개설]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도 한다. 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 등을 지지한 이들이 충청·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살았으므로 호론(湖論)이라 하며,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이재(李縡)를 지지한 이들은 서울·경기 낙하(洛下) 지역에 주로 살았으므로 낙론(洛論)이라 하였다. 지역으로 볼 때 용인은 서울 낙하 지역에 포함되며, 이곳은 낙론학자들의 주요한 근거지였다.

[논쟁의 전개]

이 논변은 처음 조선 후기 노론인 이간한원진이 1711년(숙종 37)에서 1712년까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이 당시의 쟁점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同異性),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상관 관계 등을 주제로 하였다. 그들의 서신 교환 이후 1746년(영조 22) 이재[1680~1746]가 제자 최석(崔祏)에게 지어준 「한천시(寒泉詩)」가 알려지면서 관심 있는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이 논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더 나아가 호론과 낙론으로 나누어져 대립 양상까지 띠게 되었다. 이 논변은 100년간의 논쟁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의 주요한 철학적 관심이자 정치적으로는 노론 학통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호서와 기호 학계간의 대립 양상이라는 성격도 갖게 되었다.

[용인의 낙론 학풍]

조선 후기 용인 지역의 유풍(儒風)은 기묘 사림인 조광조(趙光祖) 이후 이재로부터 진작되었다. 이재는 본관이 우봉(牛峰)이고 용인 출신으로 훗날 노론 낙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728년(영조 4) 9월부터 용인으로 옮겨와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재가 용인에 쏟은 열정은 각별하였는데 한천정사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은 강의 자료가 『천상강설(泉上講說)』이며, 1737년(영조 13)에는 충렬서원(忠烈書院)과, 1742년(영조 18)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의 원장으로 각각 취임하였다.

조선 후기 서원은 선현에 제사하고 지역 문화·학술·여론 형성의 중심이자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생전에 이곳에서 원장 등으로 활동한 내력 덕분에 훗날 노론 낙론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정몽주(鄭夢周), 이시직(李時稷) 등을 모신 충렬서원은 그가 원장을 맡은 이래 문인인 김원행(金元行), 유언집(兪彦鏶), 용인 출신이기도 한 조중회(趙重晦) 그리고 손자인 이채(李采)가 원장직을 뒤이으며 낙론적 학풍은 계승되었다.

당시 용인 지역은 용인이씨·영일정씨·연안이씨·해주오씨 등의 명문가들이 세거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문이 노론으로 그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재의 학풍은 오윤상(吳允常)·오희상(吳熙常)해주오씨 등에 전해졌으며, 특히 오희상은 낙론의 학통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용인 유림들은 호락논변시에도 주요한 활동들을 보여주었다.

한 일례로 1799년(영조23) 호론측에서 한원진의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하자, 낙론 인사들은 그 상소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변이 전개된 일이 있었다. 이때 용인의 학자인 정규채(鄭奎采)도 성균관에 통문을 발송하여 호론측의 논점을 비판하고 대응하였으며, 이채도 서간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지역사적 의미]

호락논쟁은 철학적 토론의 양상과 호론·낙론간의 학문적 도통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용인 지역에서의 호락논쟁은 낙론계의 주도자인 이재를 비롯하여 그의 문인·손자 및 많은 학자들이 용인의 충렬서원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양성하면서 정체성을 확보해 나아갔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조선 사상사에서 용인 지역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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