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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376
한자 新石器時代
영어음역 Sinseokgi Sidae
영어의미역 Neolithic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하문식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간석기를 도구로 만들어 쓰던 시기.

[개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냥이나 채집, 물고기 잡이를 하면서도 농경과 짐승 기르기를 하였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먹을거리가 부족하게 되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농경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이 시기의 곡식은 일산 신도시 지역에서 발굴된 볍씨, 옥천 대천유적의 오곡, 평양 남경유적의 조, 봉산 지탑리유적의 피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의 집터는 주로 움집으로 한 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추위나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집은 원뿔 모양이 대부분이며 크기는 20~30㎡가 많다. 집안의 가장자리에는 식량이나 연모를 넣어두는 저장 구덩이가 있고, 난방과 취사를 위한 화덕 시설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는 간석기와 함께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며, 흔히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도 한다. 남해안과 동해안의 여러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찾아지는 아래층에서 덧무늬토기나 민무늬토기가 출토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의 석기는 뗀석기를 사용하면서 붙박이 생활과 다양한 생산 활동을 하면서 기술이 점차 발전됨에 따라 간석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간석기는 날카로운 날을 얻을 수 있으며 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데 이용하였다. 용인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찾아진 곳은 기흥구 보정동과 상갈 그리고 농서리 유적이 있다.

1981년 보정동에서 찾아진 5점의 석기 가운데 3점은 뗀석기이고 2점은 반쯤 갈아서 만든 석기로 다른 지역의 이런 유물과 비교할 때 신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 용인 지역의 신석기 유적은 현재 발굴된 유적이 많지 않아 그 성격을 살펴보는 데 어려움이 많지만 인근의 서울 암사동이나 하남 미사리 유적과 그 성격이 비슷할 것으로 여겨진다.

[상갈 유적]

상갈 유적은 기흥 상갈지구 택지개발사업 지역 조사 때 명지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발굴 결과 유구는 찾아지지 않은 유물 포함층으로 밝혀졌지만 유적의 입지 조건으로 볼 때 주변에 집터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유적은 해발 100m쯤 되는 낮은 구릉 지대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오산천지곡천이 흐르고 있다.

조사 결과 여러 점의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간석기, 흙을 빚어 만든 토제품 등이 찾아졌다. 빗살무늬토기의 바탕흙은 찰흙보다 모래질이 많으며 생김새는 포탄 모양의 바리 모양[鉢形]이고 바닥은 모두 뾰족한 모습으로 중부 지역의 다른 유적에서 조사된 토기와 비슷하다. 특히 동북 지방이나 남부 지방에서 주로 찾아지는 항아리나 사발 모양의 토기는 전혀 출토되지 않아 상갈 유적 출토 토기는 지역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

토기의 크기를 보면 지름이 10㎝쯤 되는 작은 바리는 1점이고 나머지는 20~30㎝쯤 되는 것으로 밝혀져 먹을거리와 관련 있는 쓰임새를 지녔던 것 같다. 토기를 만든 방법을 보면 테쌓기와 서리기가 섞여 있는데 이것은 토기의 크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토기의 겉면에 있는 무늬는 눌러찍기와 눌러긋기 수법으로 가로 생선뼈무늬, 빗금무늬, 손톱무늬, 세로 생선뼈무늬 등을 새겼다. 그런데 눌러찍기는 입술과 몸통 부분에서 서로 다른 무늬를 새길 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늬를 베푼 위치를 보면 몸통의 아래쪽 바닥까지 남아 있어 늦은 시기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간석기는 조개날을 지닌 돌도끼로 날부분의 평면 형태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상당히 날카롭다. 실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형의 돌도끼는 경기 남부지역의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연모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토제품은 그물추 모양이지만 너무 가벼워 그 실용성은 앞으로 다른 유적의 비슷한 유물과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농서리 유적]

경부고속도로 기흥 나들목 근처에 위치한 농서리 유적은 해발 62m의 완만한 구릉에 자리하며, 동쪽에는 오산천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집터 8기와 집터 옆에서 작은 움이 여러 기 발굴되었다. 집터는 구릉의 꼭대기에 한 줄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평면 생김새는 긴 네모꼴과 네모꼴이 섞여 있다.

크기는 2호가 26.52㎡로 가장 크고 5호가 10.74㎡로 작다. 움의 깊이는 30~70㎝이며, 바닥은 모래질 찰흙을 깔아 다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 맨바닥이다. 집터의 시설로는 화덕 자리와 기둥 구멍이 찾아졌다. 기둥 구멍은 대부분 네 모퉁이에 있으며 비교적 깊게 파인 상태다. 화덕 자리는 집터의 가운데에 자리하며 평면 생김새는 타원형이다.

이곳의 집터는 발굴 조사 결과 대부분 불이 난 것으로 밝혀졌으며, 특히 2호 집터는 유물이 제자리에 그냥 남아 있어 앞으로 자세한 연구를 하면 당시의 살림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집터 안에서 조사된 유물은 물고기 등뼈무늬·빗금무늬·점줄무늬·문살무늬 등이 새겨진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갈판과 갈돌, 대패날 등이 있다.

한편 집터의 가장자리에서는 평면이 타원형인 움이 여러 기 조사되었다. 여기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나오고 있어 집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농서리 유적은 얕은 구릉 지대에서 신석기시대의 집터가 여러 기 찾아져 당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안산 신길유적, 시흥 능곡유적과 비교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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