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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4095
한자 宋秉畯
이칭/별칭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양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8년연표보기 - 송병준 생
활동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무과급제
활동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오위도총부 도사
활동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김옥균암살을 위해 도일
활동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농상공부대신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내무대신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중추원고문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자작
활동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백작
몰년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송병준 졸
묘소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산111-3 지도보기
성격 친일파
성별
본관 은진(恩津)
대표 경력 내무대신

[정의]

일제 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친일파

[개설]

함경남도 장진 출신이다. 구한말 양지현감으로 부임하여 용인과 인연을 맺었다.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제암(濟庵). 아버지는 율학훈도 송문수(宋文洙)이며, 아들은 송종헌(宋鍾憲)이고, 손자는 송재구(宋在九)이다. 송종헌송병준 사후 백작의 작위를 이었고 양지면장을 지냈으며, 손자도 양지면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함경남도 장진(長津)에서 1858년에 태어났다. 서울에서 민영환의 식객(食客)으로 있다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수문장, 훈련원판관,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여 흥해(興海)군수, 양지(陽智)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 야마구치현[山口縣] 오기[萩]에서 잠업(蠶業)에 종사하다가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었다.

헤이그 특사사건 후에는 황제양위운동(皇帝讓位運動)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上奏文),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외교를 하였다.

송병준김홍집 내각 설립이후 민씨일파로 몰리자 일본으로 피신하였을 때 양잠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조선인 청년들을 모아서 양잠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며, 노일전쟁으로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나올 때 뽕나무묘목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송병준이 서울에 한성잠업전습소를 세운 게 1911년이고 양지에 잠사강습소를 설립한 것이 1915년이니 뽕나무 묘목은 그 이전에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지(陽智)에 세웠던 잠사강습소는 후에 잠종제조소(蠶種製造所)가 되었고 광복이후에도 명맥이 유지되었다. 송병준은 양지현감을 지낸 후에도 양지면 추계리에 지었던 별저(別邸)를 유지하면서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묘소]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산 111-3 속칭 금당이골에 있었으나 2009년경 파묘되어 일부 석물과 흔적만 남아있다. 묘소 입구에 일본어와 한문으로 쓰여진 신도비가 있었다고 하나 광복이후 매몰되어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양지현감 시절 주민들이 세워준 송덕비가 있다. 또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뒤 매국의 공로로 자작(子爵)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었고 1920년에는 백작(伯爵)이 되었다.

1925년 죽은 뒤 일본 천황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 추서되었다. 백작의 작위는 아들에게 습작(襲爵)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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