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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4088
한자 趙文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종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7년 5월 19일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2008년 2월 5일연표보기 -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조선인멸시파업 주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45년 7월연표보기 - 부민관폭파 주도
출생지 화성군 매송면
학교|수학지 양지보통학교 -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일본강관주식회사 조선인차별 반대운동, 부민과폭파 주도

[정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소재 양지초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개설]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나 매송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외가댁인 양지면 양지리에서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여 양지보통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양지보통학교는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적극 지원하던 학교로, 송종헌양지면 추계리 별장에 올 때는 학교 학생들이 일장기를 들고 환영행사를 자주하였었다.

그는 어느 날 송종헌을 환영하던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가 을사늑약으로 초야에 묻혀 생활하던 외할아버지 이조영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기는 양지향교 문에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향교에 가 태극기를 확인 한 후 학교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후 항일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한다.

[가계]

본관은 풍양이며 평장사공파 24대손이다. 아버지는 조병길, 어머니는 연안 이씨이며,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43년 5월 일본 가와사키(川岐)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 연수생으로 있을때 “조선인 멸시규탄 파업”을 주도하다 수배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국내에서 대일 투쟁을 하기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47년 7월 부민관에서 박춘금이 친일 어용 집회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지 유만수, 강윤국과 개최장소인 부민관에 폭탄을 터트려 분격대회를 무산시킴과 동시에 한민족의 민족정신이 살아있음을 만방에 주지시켰다.

광복 후에는 단독정부수립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연극배우로 생활했었다.

1959년 이승만 암살 및 정부전복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83년 경기도광복회 회장, 1999년에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친일청산에 앞장서 일하다가 2008년 지병으로 타게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회고록인 『슬픈조국의 노래』가 있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2008년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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