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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66
한자 靑年運動
영어음역 cheongnyeon Undong
영어의미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진갑

[정의]

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청년들의 사회 운동.

[시대적 배경]

1920년대 청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대중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는 흐름 속에서 출현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해 국내의 계몽운동과 교육·언론 활동이 탄압받던 분위기와 달리 3·1운동 이후에는 국내 보통학교 수가 증가하고 야학 등의 교육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각지의 청년 단체들이 결성되는 정황과 관련이 깊은 것이었다.

용인의 청년운동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하였다. 1920년대 용인의 청년 단체는 11~12개 정도로 파악되며, 기흥 지역이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 전체의 청년회 조직이 210여개에 달했던 점을 고려하면, 타 지역에 비해 청년운동이 활성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용인에 조선인을 위한 중등 이상의 교육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할 만한 인력이 부족하였던 점도 작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용인 지역의 청년 활동은 용인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산업 진흥과 생활 개선을 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한편, 야학 등의 교육운동에 주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청년 단체의 활동]

용인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청년 단체는 1920년 9월 10일 기흥면에서 창립된 용흥청년회였다. 이후 모현면에서 일신친목회와 갑성회가 설립되었고, 원삼면에서는 좌항진흥회, 낙은공조회가, 이동면·남사면을 중심으로 이사청지회가 창립되었다. 그 외 외사면의 백암청년회와 내사면의 주동청년회 등이 용인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한편 기흥면의 무진청년회는 용인군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좌항진흥회이사청지회의 경우, 청년운동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기보다 청년유지들이 중심이 된 일반 사회단체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 반면 갑성회, 낙은공조회, 백암청년회 등의 경우, 무산계급 자제들을 대상으로 용인 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식민지하 청년운동은 192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조선청년총동맹이라는 전국적인 청년운동의 지도 기관이 설립되고 그 성격 또한 혁신적으로 변화해갔다.

그러나 용인 지역의 청년운동은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운동의 질적·양적 변화를 초래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1925년 이후 설립된 좌항진흥회낙은공조회, 백암청년회, 무진청년회 등이 창립 당시 표방한 운동의 내용을 살펴보면, 1920년대 전반기 청년운동의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용인에서는 1920년대 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조선공산당이나 신간회 등의 지부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조선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위축되었다. 일제는 전국 도시와 농촌의 중견청년들을 결성하여 관제 청년 단체인 청년훈련소나 청년반 등을 조직함으로써 청년운동의 성장을 제약하였다. 1930년대 용인 지역 청년 단체들 역시 부진한 활동을 면하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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