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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60
한자 黃守身
영어음역 Hwang Susin
이칭/별칭 수효,계효,나부,췌부,열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07년연표보기
몰년 1467년연표보기
본관 장수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수효(秀孝)·계효(季孝)[세종실록에는 계효로 되어 있다.], 호는 나부(懦夫)·신부(侁夫). 아버지는 세종조의 명상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황희(黃喜)이며, 형은 판서(判書) 황치신(黃致身)이다.

[활동사항]

황수신(黃守身)[1407~1467]은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다가, 학문이 부진하다고 시관(試官)에게 욕을 당하고는 발분하여 학문에 진력하였다. 문음(門蔭)으로 종묘부승(宗廟副丞)·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도관서영(䆃官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1429년(세종 11) 7월 지평(持平)·호조정랑(戶曹正郎)을 거쳐 사재감부정(司宰監 副正) 등을 지내고, 1432년(세종 14)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권제(權踶)의 요청에 의하여 경력(經歷)을 역임하였다. 장령(掌令) 재직 시에는 도성 내에서 인간의 화복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를 성 밖으로 방출하기도 하였다.

1440년(세종 22) 사섬시윤(司贍寺尹)을 거쳐, 같은 해 함길도 5진(五鎭)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민호를 사민(徙民)할 때에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 나갔었다. 이후 다시 귀환하여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지내고, 지형 조사로 체직되어 수년간에 걸쳐 결단하기 어려운 옥송을 처결하였다.

1441년(세종 23)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2년(세종 24) 겸지병조사(兼知兵曹使), 1443년(세종 25)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르고 좌부승지(左部承旨)·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46년(세종 28) 국초 이래로 문과 출신이 아니면 제수되지 못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1447년(세종 29)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을 1자(一資)씩 가자시키라는 명을 받고 친분이 있는 임원준(任元濬)을 동반으로 옮겨 제수한 것이 적발되면서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448년(세종 30) 직첩을 환급받고, 1450년(문종 즉위년) 5월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었다. 같은 해 문종의 특명으로 병조의 습진(習陣) 및 군사검찰(軍士檢察)의 논의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진법의 상정(詳定)에 공헌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 기복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어 남원군에 봉해졌을 때 세조 즉위에 반대한 신하들의 전택(田宅), 즉 이춘(李春)의 용담(龍潭) 전토와 양씨(楊氏)의 용인 집과 전토, 오율산(吳栗山)의 평전(平田) 전토, 박존수(朴存壽)의 고부(古阜) 전토와 서성대(徐盛代)의 영천(永川) 전토 등을 하사받았다.

1455년(세조 1) 우참찬(右參贊)으로 소환되었다. 같은 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재직 시에 작성한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의 지도를 올리면서 비방책(備防策)을 건의하였다. 1456년(세조 2)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1457년(세조 3)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대하면서 예조를 지휘하였다.

1458년(세조 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으며, 1459년(세조 5) 1월과 12월의 양차에 걸쳐 충청도도순문진휼사(忠淸道都巡問賑恤使)와 경상도모민체찰사(慶尙道募民體察使)로 파견되었으며, 귀환하여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자되면서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62년(세조 8) 아산의 전지를 무단히 점거하였다고 여러 차례 탄핵되었으나 용서를 받고 유임되었다. 같은 해 좌찬성으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제2차 초안(草案)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우의정이 되어 명나라 헌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왔다.

1466년(세조 12)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좌의정 심회(沈澮)와 함께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도 예문춘추관직(藝文春秋館職)을 겸대하였고, 1467년(세조 13) 영의정에 올랐다.

[저술 및 작품]

세조의 명을 받아 『법화경(法華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언해(諺解)를 주관하였고, 1465년(세조 11)에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을 찬진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고, 앞에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하나는 처음 세웠던 비이고, 다른 하나는 1943년 후손들이 마모된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비이다. 원래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세조 등위(登位)에 끼친 공로로 좌익공신에 책록되어 남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열성(烈成)이며, 전라북도 장수군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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