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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724
한자 朴世采
영어음역 Park Sechae
이칭/별칭 화숙(和叔),현석(玄石),남계(南溪),문순(文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성리학자
출신지 전라남도 나주
성별
생년 1631년연표보기
몰년 1695년연표보기
본관 반남(潘南)
대표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아버지는 교리(校理) 박의(朴猗)이며, 부인은 원두추(元斗樞)의 딸이다.

[활동사항]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1674년(숙종 즉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執義)·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남구만(南九萬)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고, 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일찍이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 관계를 가졌다.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나 좌의정이 된 이후에는 노론의 정치·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박세채의 탕평론은 선조 대에 이이(李珥)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삼례의(三禮儀)』·『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문집에 『남계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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