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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660
한자 金思穆
영어음역 Kim Samok
이칭/별칭 백심,운소,경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영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1740년연표보기
몰년 1829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손자이며, 형조판서 김효대(金孝大)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김사목은 문음(文蔭)으로 관직에 나간 뒤 김제군수를 거쳐, 1772년(영조 48)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보덕(輔德),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774년에는 승지가 되었다.

1783년(정조 7)에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영조의 즉위 60년을 맞아 병조참판으로 승진했고, 1784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총융사를 지낸 뒤, 이듬해 9월에는 형조참판이 되어 상왕대비의 호를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1788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우택(雨澤)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790년 형조판서·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이 되었다.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도사(都事) 송익효(宋翼孝)가 남형을 행사하자 왕에게 장계를 올려 그를 파직시켰다.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를 거쳐, 전라우수사와 경기감사, 총융사를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병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808년 우의정, 1819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828년에는 영중추부사 겸 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학문과 사상]

제약(制約)과 법헌(法憲)을 스스로 준수함으로써 그 임무를 다하였다.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검약을 생활 신조로 삼아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겠다 하여 그의 당호를 ‘무구실(無求室)’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소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유운리 지역에 있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70년 동안 영조·정조·순조 세 임금을 모셨는데, 90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을 맞이하여 회방(回榜:登科回甲)으로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를 경헌(敬獻)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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