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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14
한자 魄峴戰鬪
영어음역 Baekhyeon Jeontu
영어의미역 Baekhyeon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투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895년 11월 1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6년 1월 1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이천 백현
관련인물/단체 김하락|구연영|조성학|민승천|이천 의병

[정의]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백현에서 이천 의병과 일본군 수비대간에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1895년 음력 8월 20일 일본 공사관의 주도로 자행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기화로 조선의 각계각층에서 반일 기운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년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반일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가까운 이천에서도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군 수비대가 이천 의병을 진압하려 하자 백현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발단]

1895년 11월 17일, 김하락(金河洛)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화포군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의하여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앞세워 의병 모집에 나섰다. 우선 구연영을 양근·지평, 조성학을 광주, 김태원을 안성, 신용희를 음죽으로 파견하여 각군 소속 포군들을 의병으로 모집하였다.

이들 의병들은 경기도 각 군의 화포군(火砲軍)과 남한산성 소속 별패진(別牌陣) 포군을 주력으로 대오를 편성하고 교련을 실시하였다. 이후 아성에서 창의한 민승천(閔承天) 의병진과 합세하여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병진을 꾸렸다. 용인 지역의 민중들도 반일 투쟁 분위기에 자극 받아 봉기하였으며 점차 이천수창의소로 합세해 갔다.

[경과]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이 1896년 1월 17일에 이천 의병을 진압하려 한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의병은 1,000여 명의 병력을 3분하여 한 부대는 백현 아래 골짜기에, 다른 한 부대는 백현 상봉에 매복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는 백현 아래 산 우목한 곳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18일 일본군이 백현 부근에 도착하자 백현 입구에 배치되었던 조성학이 지휘하는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두어 시간 가량 사격전을 벌이다가 곧 후퇴하여 주력 부대의 매복 지점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일본군이 이를 추격하여 백현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복병이 좌우에서 협격하여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결과]

일본군은 복병의 포위망 속에서 고전하다가 날이 저문 뒤에야 시체 수십 구를 유기한 채 어둠을 타서 포위망을 간신히 탈출하였다. 의병 부대는 패주하는 일본군을 여주 장항(獐項)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궤멸시켰다.

[의의와 평가]

을미의병은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일제의 침략군에게 큰 위협을 주어 단발령은 철회되었고,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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