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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13
한자 蒙古侵寇
영어음역 Monggo Chimgu
영어의미역 Invasion of Mongoli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대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231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58년연표보기
관련인물/단체 몽고

[정의]

1231년부터 1258년까지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전쟁.

[역사적 배경]

13세기 초에 만주와 중국 북부 지방에서 일어난 몽고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과정에서 몽고는 고려에도 침략하여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였다.

[목적]

몽고는 1231년부터 1258년까지 계속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고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때 광주를 비롯한 경기 일원 지역은 몽고의 남진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전장이 되었다.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승장 김윤후를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하였다.

[발단]

몽고는 8,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231년(고종 18)에 쳐들어왔다. 이를 몽고의 1차 침략이라고 한다. 이때 고려의 중앙군은 몽고군과 황주의 동선역에서 처음으로 부딪혔다. 이때에는 몽고군의 기습에 맞서 마산(馬山)[경기도 파주]의 초적들까지 참전했다고 한다.

그 뒤 몽고군은 2차 침략을 시도하였다. 몽고는 전략상 남진을 위해서는 광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광주를 공격했으나 광주 성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몽고군은 광주를 함락하지 못하고 처인성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경과]

처인성에서 승장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은 일치단결하여 몽고의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퇴각시켰다. 특히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몽고의 5차 침략 때인 1253년(고종 40)에 충주산성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김윤후는 충주의 방호별감으로 파견되어 성을 사수하는 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윤후는 충주민을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력화시켜, 적장 야굴(也窟)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공격을 70여 일 동안 막아냈다.

당시 김윤후는 “만일 능히 힘을 다하면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너희들은 의심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 김윤후는 관청에서 가지고 있는 관노의 서류를 불살라 버리고, 획득한 우마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갔다. 결국 몽고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살리타가 전사한 뒤 1235년(고종 22) 몽고는 당고(唐古)를 앞세워 3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3차 침략 때는 경기도 지평현(양평)과 죽주성(안성)에서 벌인 전투가 주목할 만하다. 1235년 10월에 야별초는 지평현 사람들과 함께 몽고병을 쳐서 죽이고 노획한 말과 나귀를 바쳤다.

1236년(고종 23), 죽주성에서는 몽고군이 항복을 권유해도 듣지 않자 포 공격과 화공작전을 폈다. 그러나 송문주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몽고군을 격퇴시켰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에서 몽고군과 벌였던 공성전 경험을 바탕으로 적의 공격 방법을 사전에 예측하여 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결과]

몽고는 차라대(車羅大) 장수를 우두머리로 5~7차에 걸친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에도 경기도 지역의 피해는 컸다. 1257년(고종 44)에는 정부가 있는 강화도와 가까운 경기·서해도 연안을 공략하였으며, 1258년(고종 45)에는 개경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강화도 연안의 여러 지역인 승천부, 교하(파주), 봉성(파주), 수안(통진), 동성(김포)에 보내 약탈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1254년(고종 41) 한 해만도 포로 된 자가 2만6800명이고,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해를 입었다. 특히 경기도에는 강도정부가 있었으며, 몽고군이 남하할 때 항상 경유하는 곳이어서 피해가 컸다. 장기간에 걸친 몽고의 침략에 맞서 고려에서는 양인 농민과 그 이하의 최하층 백성들까지 항전하여 고려를 지켜내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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