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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385
한자 土姓
영어음역 Toseong
영어의미역 Mud Rampart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장환

[정의]

경기도 용인을 관적으로 하는 성씨.

[개설]

우리나라 성씨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15세기에 존재한 전국의 성씨 종류와 본관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용구현 토성으로 진(秦)·이(李)·송(宋)·용(龍)·엄(嚴) 등 5개와 처인현 토성 이(李)·서(徐)·지(池)·섭(葉)·김(金)·강(康) 등 6개를 나열하고 있다.

양지현에는 양량부곡 토성으로 안(安)·박(朴)·유(柳), 고안부곡 토성으로 문(文)과 망성 박(朴)·이(李)·김(金), 추계향 토성으로 안(安)과 망성으로 이(李)·지(池)가 나타내고 있다. 죽산현에는 박(朴)·최(崔)·안(安)·양(梁)·이(李)·유(庾)·민(閔)·김(金)·음(陰) 등 9개 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용인 지방을 관적으로 하는 성씨가 많았음에도 현재는 용인이씨죽산박씨, 죽산안씨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토성들이 15세기 말 이후에 본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향리 신분의 격하와 함께 본관을 바꾸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후대까지 그 계보를 잇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변천]

용구와 처인이 합쳐 용인이 되고 양량부곡양지현이 되는 등 조선 초기에 용인 지역의 행정 구획이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고려 말·조선 초 지방 제도의 정비와 함께 본관의 개편과 통폐합 및 토성이민(土姓吏民)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즉 고을 명칭의 개정과 소현의 병합, 속현의 승격과 소속의 이동 및 폐합은 동시에 본관의 개칭, 소본관의 통합과 새 본관의 생성 및 촌·향·소·부곡 등 특수 본관의 소멸 등을 가져왔다.

이처럼 고려 말·조선 초의 사회적 변동 속에서 용인 지역은 관적(貫籍) 성씨와 세거 성씨가 나누어지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용인 지역의 토성들은 고려 초기 이래 15세기 초까지 관적 또는 토착 성씨로서 각 구획의 읍사를 장악하여 향읍 사회를 지배하면서 그들의 자제들은 과거·군공·선군 등의 수단을 통해 계속 상경하여 벼슬함으로써 재경 관인 또는 사족화의 길을 걸었는데, 용인이씨·죽산박씨·죽산안씨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성장한 용인이씨와 용구진씨(秦氏)는 원래 용구현의 토성이었다. 최보순(崔甫淳)의 처부(妻父) 진중기(秦仲基)가 용구진씨이며, 최씨 정권 아래 재상을 지낸 이세재(李世材)와 조선 개국 후 개성유후를 지낸 이사위(李士渭)는 용구이씨였고, 고려 말에 평의(評議)를 지낸 이진(李珍)은 처인이씨였다.

그리고 용인 토성인 송(宋)·용(龍)·엄(嚴)과 본래 처인 토성인 서(徐)·지(池)·섭(葉)·김(金)·강(康)은 자료가 없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편찬 당시인 15세기까지는 용인에 거주했던 대표적인 토착 성씨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문벌이 숭상되자 용구이씨·용구진씨·죽산박씨·죽산안씨 등을 제외하고 나머지 토성들은 16세기 이래 다른 본관으로 바뀌어버려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양지는 본래 수원부 소속 양량부곡으로서 토성은 안(安)·박(朴)·유(柳) 3성이며 현으로 승격될 때 병합된 추계향의 성에는 토성 안(安)과 이(李)·지(池) 등 2개의 망성, 고안부곡 성에는 토성 문(文)과 박·가·김 등 3개의 망성이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양지현은 부곡 또는 향에서 현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 곳 토성들도 향·부곡 성에서 군·현 성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양지현이란 본관은 유명 조상을 확보한 성관이 없는데다가 고을 자체가 소현 또는 벽현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뒷날 양지현을 본관으로 한 성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양지현 성씨 가운데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10개 성관 가운데 절반인 5개 성이 토성으로 기재되고 나머지 5개 성은 이미 본관에서 없어진 망성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죽주의 일부가 용인군에 이속되었는데, 죽주는 고려시대부터 매우 중시되어 관내의 비봉산 봉업사(奉業寺)[현 안성시 삼죽면]에 태조 영정을 봉안한 바 있으며, 또 공민왕 때는 내향이며, 몽고 침입 때는 송문주(宋文冑)가 죽부방호별감으로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고 성을 지키는 등 정치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또한 995년(성종 14)에는 단련사를 파견할 정도로 일찍부터 주읍으로 존재한데다가 토성 수도 9개가 되었으며, 그 가운데 죽산박씨죽산안씨는 고려 초기 또는 후기에 문벌 귀족과 권문 세족으로 발전하였다.

[현황]

1. 용인이씨(龍仁李氏)

시조 이길권(李吉卷)은 고려시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냈다. 신라 말 경기도 용인 지방의 토호였던 그는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훗날 지금의 용인인 산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고려 단종 때 문하시랑을 지낸 이공(李恭), 인종 때 평장사를 역임한 이현후(李鉉候), 충숙왕 때 판도판서 이광시(李光時), 구성부원군을 지낸 이중인(李中仁) 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특히 이중인(李中仁)이성계의 역성 혁명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렸고 조선 개국 후에는 머리를 풀고 산속에 들어가 은둔했던 절신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상 3명, 대제학 3명, 청백리 1명, 판서 16명, 문과 급제자 86명을 배출했다. 이세백(李世白)·이의현(李宜顯)은 부자 정승으로 유명하고, 이일(李鎰)은 임진왜란 당시 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의 원군과 함께 평양 수복에 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대사간이었던 이사경(李士慶)은 당시 세력을 장악했던 대북파에 아부하지 않고 정사를 처리한 명신이었다.

특히 순조 때의 화가로 구름·초목·나는 새 그림에 뛰어났던 이재관(李在寬)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의철(李宜哲)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집성촌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유운리 일대와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이다.

2. 죽산박씨(竹山朴氏)

죽산은 용인시와 안성시 일부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고려 초에 죽주로 고쳤다가 현종 때는 광주에 속하였다. 조선 태종 때 죽산으로 개칭하였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다가 1913년 일부는 용인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안성군에 합해졌다.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경명왕의 넷째 아들 죽성대군 박언립의 아들로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그 후 죽주백에 봉해지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죽산으로 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철성백파의 후손에게 음성과 고성을 식읍으로 하사함으로써 그들이 음성박씨와 고성박씨로 분파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서(朴犀)·박전지(朴全之)·박원형(朴元亨)·박홍구(朴弘耈)·박명현(朴名賢)·박명룡(朴命龍)·박문수(朴門壽)·박경신(朴慶新)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3. 죽산안씨

구죽산과 신죽산 두 파가 있는데, 구죽산의 시조는 고려의 상서좌복야 안영의(安令儀)이다. 신죽산의 시조는 고려의 시중(侍中) 안원형(安元衡)이다. 구죽산에서는 고려시대에 공민왕의 국구로서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안극인(安克仁), 그의 아들로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낸 안숙로(安淑老)가 있다. 조선에서는 안숙로의 손자로 세종의 부마 안맹담(安孟聃), 안맹담의 8세손으로 현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숙종 때 황해도관찰사·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안진(安縝), 영조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거쳐 돈령부판사에 이른 안윤행(安允行), 이조판서를 지낸 안광직(安光直) 등이 있다.

신죽산의 인물로는 시조 안원형의 손자로 고려 말의 무신 안노생(安魯生)이 있다. 그는 조선 태종 때 개성유후(開城留後)와 경기도와 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시조 안원형의 9세손인 안방준(安邦俊)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력하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고, 그 후 지평·장령·참의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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