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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003
한자 鄭從韶
이칭/별칭 가정(可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순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정종소 문과에 급제
출생지 정종소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묘소|단소 정종소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숙모전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영일 정씨
대표 관직 이조좌랑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출신 문인.

[가계]

정종소(鄭從韶)의 본관은 영일, 자는 가정(可貞)이다. 고조는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 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이고, 증조는 영일 정씨 영천 입향조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이고, 조부는 사정(司正)을 지낸 정위(鄭瑋)이다.

아버지 정문예(鄭文裔)는 생원(生員)으로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영양 이씨(永陽李氏)는 부사직(副司直) 이현실(李玄實)의 딸이다. 부인 숙인(淑人) 윤씨(尹氏)는 부윤(府尹) 윤통(尹統)의 딸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찰방(察訪) 정이휘(鄭以揮), 홍문관 교리(弘文館郊理) 정이교(鄭以僑), 정이심(鄭以諶)이며, 사위는 권흠조(權欽祖)이다.

[활동 사항]

정종소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제일봉 아래에서 태어나 외숙인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을 쫓아 수학하여 문예가 일찍 창달되었다. 1447년(세종 29) 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고, 가을에 중시(重試)에서 성삼문(成三問)과 동반 급제하였다. 공은 성균관에서 집현전(集賢殿)으로 옮겨 그 명성을 날렸고, 다시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

단종이 손위하고 이어서 사육신(死六臣)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외숙인 이보흠도 살육되자 정종소는 더 이상 벼슬길에 머물 뜻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내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병을 빙자하여 불취했다. 외직으로 제수되자 부임하여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였다.

의성 현령(義城縣令)·영천 군수(榮川郡守)·예천 군수(醴泉郡守)·함양 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나 모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선정(善政)의 치적을 남겼다. 영천 군수 재임 시에는 무릇 시정(施政)의 모든 동정과 이합집산이 자로 잰 것처럼 하여 오직 진실하고 엄격했다. 신실(信實)로 상부를 받들고 깊은 정과 따뜻함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강직하게 질투와 비리를 물리치는 등 1년도 못되어 민정이 바로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일찍이 영천(榮川)의 소루(小樓)의 기문을 썼는데, “이 읍에는 어진 군수로서 뛰어나게 나타났던 인물이 군민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있는 분들로는 호정(浩亭) 하륜(河崙)정습인(鄭習仁)과 최원유(崔元濡) 등 3인이 있었고, 현재의 군수 오천정공(烏川鄭公)도 이와 동등한 류의 한 분이다.”라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팔준도(八駿圖)」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에 있으며, 9세손 정중기(鄭重器)의 묘지문(墓誌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의 묘소 아래 묘재(墓齋)인 원당재(元堂齋)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영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댓글은 개인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운영 정책에 따라 부득이하게 삭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201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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