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관노들이 가면을 쓰고 추는 성황신제 계통의 탈춤을 중심으로 강릉 단오제 때 행하는 민속극. 「강릉 관노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구한말까지 강릉부에 속했던 관노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매년 단오 때마다 관노들이 놀이판에 직접 참가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무언극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강릉 관노 가면극」은 조선시대의 다른 가면극처럼 풍자가 혹독하...
-
강릉부에 부임하였던 역대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관원 명부. 관원의 진퇴지적(進退之蹟)을 기록하여 권과(權課)의 규범으로 삼고자 관아에서 간행한 것이다. 필사본이며 8행에 각행 20자이다. 크기는 가로 29.7㎝, 세로 41.7㎝이다. 4침(針) 선장(線裝)이다. 신라 이사부(異斯夫)부터 역대 강릉부에 부임한 관원의 부임시기와 퇴임...
-
조선시대의 효자.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사람들과 함께 들일을 하러 갈 때에는 어머니를 업고 가서 나무 밑에 앉혀 놓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자기 밥을 받아서 어머니에게 주고 자기는 일손을 쉬지 않았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이 점심을 나누어 먹자고 하면 사양하며 “내 점심은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또 남의 점심을 나누어 먹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머니...
-
강원도 강릉시 모산로 170-52[담산동 313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전통 한옥. 원래 강릉김씨가 대를 이어 살았으나 후에 찰방이라는 벼슬을 지낸 남석이 이사하면서 찰방집이라고 불렸다. 이후 남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으며 1992년에 현 소유주로 바뀌었다. 강원도 강릉시 모산로 170-52[담산동 313번지]에 있다. 강릉시 남서쪽 방향으로 2㎞쯤 떨어진...
-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269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때 세워진 가옥. 정확한 건립 연대는 미상이며 원래 초가지붕을 1940년에 기와집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아래채는 방으로 되어 있으나 전면 창호의 개조 흔적으로 보아 옛날에는 광과 마구간으로 사용한 듯하다. 자연석 초벌대 기단을 쌓은 후 팔작지붕 5량가의 안채를 배치하고 좌측 끝의 부엌에 이어서 맞배지붕의 아래채를 붙여서...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 497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전통 주택. 강릉의 이름난 선비 박계동이 살았던 곳으로 사랑채는 300년, 안채와 마구간은 150년 정도 되었으며 1990년도에 개와를 하면서 조금씩 개조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 497번지, 전면에 넓은 들판이 펼쳐진 구릉지의 중턱에 높게 위치하고 있다. 방과 방 사이에는 원...
-
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선비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100분의 선조들을 생각한다. 그 인물들이 노래에 나오는 대로의 훌륭한 생애를 살아갈...
-
조선시대 강릉부사를 포함한 19기의 선정비. 역대 강릉부사 및 관찰사의 선정송덕비(善政頌德碑)로 19기이다. 이중에는 진사최공재린유혜불망비(進士崔公在璘遺惠不忘碑)와 충노문리동행적비(忠奴文里同行蹟碑)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 사항이다. 역대 강릉부사와 관찰사들의 선정(善政)을 찬양한 송덕비인 관계로 선정비군(善政碑群)이라 하였다. 지방 관리가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떠난 다음 그...
-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명주동·용강동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강릉부의 행정성(行政城). 읍성(邑城)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치소지(治所地)에 축조한 성곽으로 조선 전기에는 대략 120여 곳이 유지되었다. 상비군에 의한 충분한 조치가 어려웠던 당시 불시에 발생하는 외침으로부터 주민의 생명은 물론, 지방 관아의 각종 행정 자료와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읍성이 필요하였다....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신리천로 342[장덕1리 164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전통 가옥.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신리천로 342[장덕1리 16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도로에 면하여 평지 위에 건축되었으며 앞에 교향천이 완만하게 굽이쳐 흐르고 뒷산에는 노송이 우거져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건립 연대는 80년 전으로 추정되며 안채의 부엌을 입식으로 개량...
-
강릉시 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 기관. 강릉 향교는 1411년(태종 11)에 불타버린 것을 1413년 강릉대도판관(大都判官) 이맹상(李孟常)이 강릉의 유지 68명과 함께 발의하여 중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다. 1909년에는 강릉 향교 안의 명륜당(明倫堂)에 화산학교(花山學校)를 건립하였으며 1910년에 폐교되었다. 1919...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시호는 문정. 강인(姜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고, 아버지는 강주(姜籀)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사와 강원감사를 지냈기 때문에 강릉과 인연을 맺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될 정도로 재직 중에 청렴...
-
강릉 지방에서 직조된 베.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의복 재료로 사용하여 온 것은 대마(大麻), 저마(苧麻)이다. 옛 문헌에는 대마와 저마를 구분하지 않고 마(麻)로 기록한 경우가 많고 이들 직물의 경우도 포(布)라고 기록한 경우가 많다. 대마는 기후에 잘 적응하는 식물로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며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왔다. 옛 직물에 있어서 포(布)란 대마포(大...
-
절에서 불경을 얹어놓고 읽을 때 쓰는 책상. 책을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하는 서안(書案)과 유사하며 불탁자(佛卓子)를 축소시킨 듯한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본래 경상은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쓰이던 것이 왕실은 물론 귀족층에까지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부유층에서도 사용하였다. 과거에 경전은 두루마리로 된 것이 많아 책상의 상판이 곧고 판판하면 굴러 떨어질 우려가 있...
-
한국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민간 협동체 문화. 강릉 지역의 사회 조직으로서 계 문화는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현전하는 미타계(彌陀契) 자료는 불교의 신도회로서 이미 고대사회에서 조직 운영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죽장회(竹杖會)와 조선 중기의 약국계(藥局契), 사후계(射侯契), 향약계...
-
조선 중기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고욱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고욱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5년(명종 10)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2세에 남편이 병이 들어 급기야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며칠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도 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다. 고익지(高益智)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부영(府營) 및 어사(御使)에게 호소하여 포상을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부. 나이 19세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다하고 삼우제(三虞祭)가 끝나는 날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고제인(高濟寅) 처 전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여러 번 관부에 알려져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는 글이 내려졌다....
-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족, 혈연, 지연, 학연, 촌락, 동문수학, 나이(동갑) 등을 매개로 결성되는 결사체.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계라고 하면 ‘아줌마들’이 식당에서 벌이는 회식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계모임, 계가 깨졌다, 패가망신… 이런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목돈을 모으는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식이 계의...
-
조선시대 관리선발 시험.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문과는 식년시와 별시로 나누어 시행되었는데, 식년시는 초시[향시]·복시[회시]·전시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강원도의 경우 초시에서 15명을 선발하여 복시에 응시토록 하였다. 또한 사마시는 초시와 복시로만 실시하였는데, 강원도 향시에서는 45명이 선발되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 중 복시에 합격한 사...
-
조선시대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 부담했던 인삼과 관련한 부세(賦稅). 조선 후기 인삼의 징수나 납부 방법은 임토지공(任土之貢)의 명분에 따른 공물납, 포·미·전 등에 의한 대납(代納), 삼공인에게 청부하여 납부하게 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또한 징수형태도 백성들로 하여금 채취 납부하게 하는 것과 대동법에 의한 포전곡의 징수, 무삼(貿蔘)이라는 이름으로 시가의 절반 이하 정도의 비용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천로(天老). 구강(具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신충(具信忠)이고 아버지는 구이(具頤)이다.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현감 이의영(李宜榮)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성리학에 몰두하여 명망이 있었고 언론을 통하여 기묘사림파에 대한 신원의 길을 열었다. 1519년(중종 4)에 생원이 되고 1528년 식년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박사를 거쳐...
-
조선 중기의 문신. 고조는 문직장(文直長)을 지낸 권의(權義), 증조는 문판관(文判官)을 지낸 권심(權深)이다. 할아버지인 권종(權悰)은 대사성(大司成)을, 아버지인 권적(權迪)은 현령을 각각 역임하였다. 1484년(성종 15)에 태어났으며 1560년(명종 15)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중종반정 다음해인 1506년(중종 1)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으며 성균...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사균(權士均)의 가계, 행적 등을 기록한 비. 권사균의 호는 보진당이다. 보진(葆眞)이란 마음이 자세하고 한결같아 공부에 전념하여 천심(天心), 즉 도심(道心)의 진리를 회복하여 그 진리를 효우(孝友)의 근본으로 삼고 자손훈계(子孫訓戒)로 남기고 행동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권사균의 명의(名義)를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62...
-
조선시대의 효부. 권수근은 효자 권은상(權殷常)의 후처 김씨의 아들이다. 권은상의 며느리는 정씨이다. 시어머니인 김씨가 제사를 보러 친정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겨우 집 앞에 있는 산에까지 와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아들을 부르자 홀로 있던 정씨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가 자기 치마를 찢어 시어머니의 발을 감싸...
-
조선시대의 열녀. 열아홉의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머리를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권수영(權秀永)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동호승람(東湖勝覽)』 열부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22세 때 남편이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남편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으나, 남편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최씨는 시부모께 영결을 고하고 조용히 남편을 따라 죽었다. 권진수(權震洙)의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
조선 중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에 적을 피해 산골짜기로 들어가다가 적을 만났다. 적이 김씨를 욕보이려고 하자 김씨는 칼을 빼앗아 자살하려고 하였다. 김씨는 있는 힘을 다해 대항하며 끝내 굴하지 않았다. 적은 화를 내며 김씨를 베고 가버렸다. 윗동서인 권처평의 처 최씨 또한 정조를 지켰다....
-
강원도 강릉 지역에 살았던 조선 중기의 열녀.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으로 진사 최문해(崔文海)의 딸이다. 권처평(權處平)의 처 최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만나 욕을 보일 위기에 처하자 벼랑에 스스로 몸을 날려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켰다. 아들 권덕유(權德裕)는 왜적의 손에 죽은 어머니 시체를 안고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
그릇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상자. 궤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나무 상자로 책에서부터 신주(神主)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보관할 수 있다. 따라서 보관하는 물품에 따라 크기도 다양하고, 이용계층도 궁중을 비롯한 관청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탈해왕이 길이 20척, 너비 13척의 궤에서 나왔고, 경주김씨의 시조인...
-
조선 중기의 충노. 심원준(沈元濬)의 여자 종으로 지극정성으로 주인을 섬겼다. 심원준의 처인 김씨가 사경을 헤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소생시켰다. 향리 사람들은 주인을 극진히 섬긴 그 충성에 감복하여 ‘충노 금복 비(忠奴 金福 碑)’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 마음을 기렸다....
-
조선 중기의 효자.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 첨지(僉知)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호는 동화(東華).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 사람이다. 김경시(金景時)는 김경황(金景滉)의 아우로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김경황과 함께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교수(敎授)를 지냈다. 강릉대도호부사...
-
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회생시켰으나 남편은 사흘을 더 살다 죽었다. 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죽고 싶으나 시부모가 계시고 또 뱃속에 아이가 들었으니 한때의 슬픔을 참고 견디어 뒤에 바른 길로 가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아들을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라”고 가르쳤다. 묘막에서 삼년상을...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김담(金譚), 동생 김경시(金景時), 아들 김한(金垾) 등 3세에 걸쳐 4명의 효자를 배출한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사람이다. 자는 자호(子鎬), 호는 둔암(遯菴).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부인은 정해(鄭瀣)의 딸 숙부인 연일정씨이다. 참봉(參奉), 첨추(僉樞)를...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자는 자용(子容).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효자공 금산파(金山派) 파조이다. 아버지는 김당(金譡)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대연(崔大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광헌(金光軒)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참봉 최읍(崔浥)의 딸과 강릉함씨 함비용(咸備容)의 딸이다. 함비용의 딸은 오봉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함헌(咸軒)의 증손녀이다. 숙부 김담(金譚),...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광백의 아버지는 김기(金玘)이고, 할아버지는 김용려(金用礪), 증조는 김보(金黼)이다. 처부는 군수를 지낸 최운상(崔雲祥)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 비인현감(比仁縣監) 재직 시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어 향리들의 작폐가 심해지자 사헌부에 체직(遞職)을 요청하였...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임(子任), 호는 이설당(梨雪堂). 김세훈(金世勳)의 아들이고, 애일당(愛日堂) 김광철(金光轍)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덕이 높고 도량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이기(李芑)나 윤원형(尹元衡)이 세력을 떨치며 권력을 농단할 때에도 자신의 뜻을 전혀...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세훈(金世勳)이다. 안성이씨 이석진(李碩進)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양(金讓)은 직장(直長), 둘째 김인(金訒)은 찰방(察訪), 셋째 김근(金謹) 주부(主簿), 넷째 김겸(金謙)은 별좌(別坐)였고, 사위는 심운(沈雲)과 참판을 지낸 허엽(許曄)이다. 1487년(성종...
-
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중여(仲輿), 호는 정봉(鼎峰).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24세손으로 고조는 현령(縣令)을 지낸 김윤귀(金允貴), 증조는 증통훈대부좌통례(贈通訓大夫左通禮) 생원(生員) 김필양(金匹陽), 조는 헌납을 지낸 김지(金墀)이다. 1487년(성종 19)에 증통훈대부군자감정(贈通訓大夫軍資監正) 생원공(生員公) 김반석(金盤石)과 진사 최유남(崔洧南)의 딸...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광헌(金光軒)[1485~1539]의 묘비. 김광헌의 자는 중여(仲輿)이다. 조는 헌납 김지(金墀), 부는 군자감정을 지낸 생원 김반석(金盤石), 모는 최입지(崔立之)의 후손인 진사 최유남(崔洧南)의 딸이다. 김광헌은 최치운의 손자인 현감 최세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임경당 김열(金說)이다. 1540년 후손들이 김광헌의...
-
조선시대의 효부·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고 그 피를 입에 넣어 사흘을 회생시켰다. 남편이 마침내 죽자 자살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사지내는 날 남편의 시신과 함께 구덩이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시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죽으면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집안사람들이 온갖 말로 타일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낙범(金洛範)...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김주원의 후손으로 부친은 낭장(郞將) 김광복(金光輻)이고, 모친은 삼척심씨 군수(郡守) 심희전(沈希佺)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초시(初試)에 뽑혔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김담의 나이 70세에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는 변을 맛보기도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
조선 중기의 효자. 김덕장(金德璋)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으로 1550년(명종 5년)에 강릉에서 태어났다. 무공랑행평강훈도(務功郞行平康訓導)였던 김덕장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석에 들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아버지가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끊어 생피를 올리기도 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3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임경(任卿).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김윤신(金潤身), 고조는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김세달(金世達), 증조는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김광언(金光彦), 할아버지는 군자주부(軍資主簿) 김수(金鐩),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참의(參議) 장호(張昊)의 딸이다. 부인은 간재(艮齋) 최연(崔演)의 후손인 최유성(崔有成)...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숙무(叔武), 호는 지봉(芝峰).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 호조좌랑, 정언, 공조참의, 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정경세(鄭經世)와 함...
-
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가묘(家廟)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신주를 구해냈다. 김병구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신주를 구해낸 사실을 사림에서 알려 호역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김수호(金壽浩), 형은 김병렴(金秉濂)이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약을 구하려고 먼 곳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산삼을 얻었으며, 꿩이 품으로 날아들어 아버지께 잡아 드렸다. 김병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김수호(金壽浩)의 아들이다. 동생은 효행으로 감찰에 증직되었던 김병락(金秉洛)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상을 치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김병렴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평소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시어머니와 함께 자다가 시어머니가 변소에 간다기에 부축하여 문을 나섰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시어머니를 잡아가려 하였다. 최씨는 한 손으로 시어머니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호랑이를 내리쳤다. 호랑이는 몇 발자국을 끌고 가다 버리고 달아났다. 최씨는 시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정성껏 치료하였으나 이튿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
조선시대의 효자.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얼마 동안 더 살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냇물을 건너 성묘를 하였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이 묘막을 지어 주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호랑이가 와서 김부경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김부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숙(正淑) 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16년 증광시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었을 때 폐모(廢毋)를 주장하던 이조좌랑 황덕부(黃德符) 등을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1...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건보(健甫). 김준현(金峻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호변(金虎變)이고 아버지는 김홍적(金弘績)이다. 1658년(효종 9) 경릉참봉이 되고, 166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김천찰방·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66년(현종 7)에는 홍천현감을 지냈다. 경직(京職)에 돌아와서는 1667년 정언을, 1670년 지평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퇴옹(退翁). 부정(副正) 김경생(金慶生)의 5대손으로 현령 김윤귀(金允貴)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김필양(金匹陽)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김대(金臺)이고 어머니는 강릉권씨 권경수(權景壽)의 딸이다. 아들은 김광진(金光軫)과 김광철(金光轍)이다. 1486년(성종 17)에 생원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습(金習)이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었고, 머리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3년상을 무사히 끝내고 제사를 마친 최씨는 다음날 앓지도 않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습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편 김시린(金始麟)이 애통한 나머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사흘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 집안사람들이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상을 마친 뒤 남편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김시린 처 최씨에 대한...
-
조선 중기의 효자. 어머니가 염병을 앓다가 오랫동안 기절해 있자,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그때 김시민은 동생 김시맹(金時孟)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의 입술에 생기가 돌더니 정신을 차렸다. 또 26세 때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목욕재계하고 하늘...
-
조선시대의 열녀. 어려서부터 가정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며, 시집을 가서는 남편 김시중(金始重)과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인 김시중이 기랑(騎郞)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오는 중 양근현(楊根縣)에서 갑자기 병이 나 위독하게 되었다. 마침 김시중의 종이 밤새 달려와 병세를 알리자 팔순인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시어머니를 위로한 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
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는 김여계(金汝契)이며 어머니는 김겸(金謙)의 딸이다. 아우는 김양신(金養身), 김양정(金養正)이며 아내는 최충남(崔忠男)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올라 첨정(僉正)·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고, 집현전 창정(集賢殿 彰幀)을 개수(改修)하였다. 김양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언진(金彦鎭)이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어린 자식들과 영원히 이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김언진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김언진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김연범(金演範)은 효자 김의진(金義鎭)의 현손이고,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의 후손이다. 증광초시(增廣初試)에 올랐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 여섯 살 때에 참새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짓기를 “넓은 들 곳곳에 새 쫓는 소리, 천년을 한결같이 신농(神...
-
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가 위독하자 낮에는 의원에게 약을 구하였고 밤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시어머니가 목숨을 거두자 죽은 시어머니의 입에다 자신의 입을 대고 밤새도록 목구멍에 침을 흘려 넣으니, 다음 날 아침 시어머니의 방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살아난 시어머니가 “목숨에는 한정이 있으니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남편 김연생(金演生...
-
조선 중기의 문신. 1507년(중종 2) 강릉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강릉부사(江陵府使)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김연수가 강릉부사(江陵府使) 직을 그만 둔 것은 당시 도사(都事)에게 욕을 받자 이에 굽히지 않고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조에서 그를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임명하였다. 충청도별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졸하였다. 김연수에 대한 기사는 『증수...
-
조선시대의 열녀. 20세에 남편 김연조(金演祚)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이 제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먹지 않고 슬퍼하다가 결국 죽었다. 효행이 관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현감 최세번(崔世蕃)의 딸이다. 김열(金說)의 아버지 김광헌은 1519년(중종 14)에 진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고 난 후에 과거에 뜻을 버렸다. 김열(金說) 또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오직 글 읽기에만 힘썼다. 아무리 춥고 더...
-
조선시대의 효자. 강릉 정동(丁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경포동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이웃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며, 행실이 바르고 절도가 있어 친척과도 화목하였다. 나이 6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사림에서 효행을 부영(府營)에 알려 표창을 하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운성(金雲成)은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영남 지방에 갔다가 죽었다. 당시 부음을 듣고 시신을 거두려 곧 달려가려 했으나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애들이 있어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침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하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남편이 죽은 곳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남편의 유골을 거두어 짊어지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이 중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하였고, 남편의 변을 맛보며 병을 관찰하였다. 남편이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호숫가로 달려갔는데, 그때 마침 커다란 잉어가 뛰어올라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잉어를 잡아 남편에게 먹였지만, 남편의 병이 더 위급해졌다. 그러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輸血)하였다. 김원의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0세 때 남편 김윤수(金潤洙)가 중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으나 남편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문을 닫아걸고 빗장에다 목을 매었으나,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죽지 못했다. 남편의 무덤에 가서 슬피울다 근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나무꾼이 발견하고 구해 주었다. 두 차례에 걸쳐 자결을 시도...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할 때, 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묘소까지 왕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겨울에 폭설이 내려 묘소로 가는 길이 막혔다. 이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눈을 헤쳐 길을 내 주었다고 한다. 김의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
조선 중기 문신인 김이려(金以礪)의 묘지석(墓誌石).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묘지명이다. 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인(金訒)의 묘지석(墓誌石). 김인[1516~1571]의 자는 대인(大仁)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김주원의 후손이다. 증조는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행봉정대부 사간원헌납(贈通政大夫 禮曹參議 行奉正大夫 司諫院獻納)을 지낸 김대(金臺), 할아버지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봉정대부 종부시첨정(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奉正大夫 宗簿寺僉正)을 지낸 김세훈(金世勳), 아...
-
조선 중기의 효자. 임진왜란 때 늙은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하던 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뒤쫓아 오자 김인호는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달아나다 결국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는데, 효행에 감동한 왜적은 김인호의 어머니를 그대로 살려 두고 갔다. 김인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자흠(金子欽)의 신도비. 김자흠은 1444년(세종 26)에 과거에 올라 수직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김자흠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두호미(豆乎彌)에 있다. 화강암 비좌, 비신, 지붕돌[옥개석]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272.5㎝이고 비신의 폭은 82㎝이다. 1971년에는 후손들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4세 때 남편 김작(金焯)이 중병에 걸리자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지만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생각한 바가 있어 슬픔을 참고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그러다 남편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 졸곡(卒哭)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작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
조선시대의 열녀. 중병에 걸린 남편 김재경(金在卿)을 8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늙은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낮에는 방아를 찧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여 남편과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해 목숨만 겨우 이어갈 형편이었지만 조금도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재경 처 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
조선시대의 열녀. 하루는 남편 김종석(金宗碩)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나무와 돌에 치여 크게 다쳤다. 남편이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피가 남편의 양쪽 폐에 들어가 대소변이 막혀 있었다. 그러자 밤에 자기를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남편의 생식기를 입으로 빨아 소변을 통하게 하였다. 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남편을 소생시켰다....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남양2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 와요지가 있는 남양리는 본래 강릉군 옥계면 지역으로 1916년 올밑, 진목정, 응달말, 옹구점, 흑싯골, 범울이, 영내터, 정상골, 피밀을 합하여 남양리라 했다. 도요지 이름은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강원도 강릉시에서 강원도 동해시 방향으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옥계톨게이트에서 내려 옥계 방...
-
금전을 보관하는 궤. 위판이 열리는 위닫이 형태로 긴 장방형이다. 문판은 3개의 제비추리형 경첩으로 여닫게 되어 있고 상단 중앙에 꺾쇠형 받침대가 ‘ㄱ’자 모양으로 내려와 제비추리형 자물쇠 앞바탕의 배목과 결합하도록 되어 있다. 각 이음새는 제비추리형 감잡이로 잡았고 양쪽 옆판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금전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조선시대 유물 1점...
-
쌀·콩·팥 등 곡식을 담아두는 통. 형태는 두꺼운 통판으로 듬직하게 궤짝처럼 생겼고 네 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려 있다. 위로 뚜껑을 제쳐 열 수 있게 되어 있고, 보통 광이나 마루 한 구석에 두는 데 자물통으로 뚜껑을 잠가 둔다. 집안의 형편에 따라 크기가 다양한데 1가마에서 2가마까지의 쌀을 담아 둘 수 있다. 벼를 담는 것도 ‘뒤주’ 또는 ‘나락뒤주’라고 부르는데 그 모양이 쌀...
-
문서를 보관하는 나무상자. 물건을 보관하는 나무상자로는 궤와 함이 있다. 궤와 함은 굳이 구별하자면 함은 소형상자로서 뚜껑이 위에 있거나 그 후면에 경첩을 단 것이고, 궤는 함에 비하여 비교적 대형이며 문판이 앞면에 부착되거나 뚜껑을 위에서 씌우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문서를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조선시대의 문서함 1점이 소장되어 있다. 각 모서리는...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대관(大觀), 호는 강호(江湖)·사지(四止). 부친은 박시행(朴始行)이고, 모친은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진사 남과(南薖)의 딸이다. 26세 때인 1495년(연산군 1)에 생원이 되었으나, 수신(修身)과 독서에만 힘쓸 뿐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1516년(중종 11) 가을 금강산에 유람 왔던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박공달(朴公達)을 만나보고...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더욱 공경하며 모셨다. 관찰사가 표창을 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관가에서 효열 완문을 발급하였다. 박구호 처 장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삼가당(三可堂) 박수량(朴遂良)의 후손이다.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 배설물을 맛보아가며 치료하였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사림에서 부영(府營)과 예조에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아픈 시부모를 위해 새와 물고기를 구해 시부모를 정성껏 보살폈다. 또한 남편 박문오(朴文五)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1년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았으며, 어린 자식들을 훌륭히 길렀다. 박문오 처 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영(府營)에...
-
조선시대 열녀. 나이 18세 때 남편 박병은(朴炳殷)이 위독하자 손가락 세 개를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7일을 더 살다 죽었다. 남편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모님을 두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을 끝까지 정성껏 봉양하여 마을에서 효열이라고 칭송하였다. 박병은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박수량(朴遂良)의 후손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켰으며, 어머니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흙덩이를 던져 오리를 잡아 드렸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우물까지 거리가 멀어 여름철 홍수 때나 겨울철 폭설 때에 불편이 많았다. 그...
-
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화적(火賊) 떼 수십 명이 집 안에 들어와 남편을 죽이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화적들이 버린 큰 종이로 얼굴을 덮어쓰고 화적들 틈에 섞여 함께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가위로 화적들의 옷깃을 몰래 잘라 놓았다. 화적들이 흩어진 후 관가에 가서 전후의 실상을 낱낱이 알려 화적들의 만행...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18년(중종 13) 7월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거쳐 사섬시주부(司...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 부터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가서는 시부모님을 더욱 정성껏 공경하였다. 박시언 처 김씨의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알려져 암행어사와 관찰사가 포상을 하였으며,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 중기의 효자. 강릉 12향현(鄕賢) 중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박수량의 조카 선무랑(宣務郞) 박구량(朴久良)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신로(崔信老)의 딸이다. 1563년(명종 18)에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있다가 영평군수(永平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다...
-
조선 전기의 선비인 박영근(朴榮根)[1427~1497]의 묘갈. 박영근의 자는 영숙(英叔)으로 영민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22세에 사마시에 올랐으나 병으로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최방(崔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승소(朴承紹), 박승휴(朴承休), 박승서(朴承緖), 박승필(朴承弼)이다. 넷째 아들 박승필이...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이 병이 나서 산 꿩을 먹고 싶어 하였다. 하늘에 꿩을 구할 수 있기를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 꿩이 닭장에 들어와서 이를 잡아 주었다. 남편의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주고 다시 또 한 손가락을 찢어 연달아 그 피를 입에 넣어 소생시켜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열행이 알려져 강릉부사와 어사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80세에 종기를 얻어 온몸에 번졌다. 박재환(朴在煥)은 밤낮으로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약을 구하러 다니다, 길에서 노인을 만나자 노인이 두꺼비와 뱀을 복용하라고 하였다. 마침 겨울철이라 구할 길이 없었다.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옆 숲 속에서 두꺼비가 뛰어 나오기에 잡아서 드렸다. 또 다음날에는 까마귀가 날면서 어지럽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형부(亨夫), 호는 송곡(松谷). 박제상의 후손으로 생원인 박중경(朴中敬)의 5대손이다. 훈도(訓導)인 박영식(朴榮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박곤강(朴崑岡)이다. 아버지는 진사인 박유검(朴有檢)이며 어머니는 밀성김씨(密城金氏)로 사어(司禦)인 김충일(金忠一)의 딸이다. 박정원(朴貞元)은 삼가정(三可亭) 박수량의 종질(從姪)로서 15...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려 하루를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을 먹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고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증석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정면의 반쪽만을 젖혀 열도록 두꺼운 궤(櫃) 모양으로 만든 가구. 반닫이는 지방에 따라 특성을 살린 여러 형태가 있는데 특히 강화 반닫이는 세공이 뛰어나고 무쇠와 놋쇠를 재료로 한 금구장식이 뛰어나 가장 상품으로 꼽힌다. 반닫이는 상단 중앙부에 뻗침쇠가 ‘ㄱ’자 모양으로 내려와서 제비추리 모양과 비슷한 자물쇠 앞바탕에 걸리게 되어 있으며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가...
-
조선시대의 효부·열녀. 시아버지가 병에 걸려 노루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었다. 이에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원하자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 마구간으로 들어왔다. 얼른 노루를 잡아 시아버지에게 먹였다. 얼마 후 시아버지의 병이 다시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시아버지가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최씨는 시집간 지 3개월...
-
효자 김담(金譚)을 제향한 재실. 보진재(葆眞齋)는 강릉김씨 노암파 종손 김재인(金載仁) 소유로, 하늘이 내린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효자 김담의 제향을 위한 재실이다. 제향 시기는 매년 음력 9월 10일이다. 강릉시 모산로223번길 28-10[장현동 334번지]에 숭모재(崇慕齋)가 따로 있다. 보진재는 원래 정려각이었다. 1571년(선조 5)에 강릉부사 봉래...
-
조선시대 사일거사(四一居士) 심래조(沈來祖)가 지은 정자. 봉황이 많이 날아오르는 곳이라 하여 봉래정이라고 하였다. 심래조가 무릉도원을 찾던 중 황지미골이 무릉도원과 비슷하다 하여 냇가 바위에 방도계(訪桃溪)라는 글씨를 새겼다. 또한 개울 건너에는 봉래정을 짓고 그곳에서 소일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상계리에 터가 있다. 봉래정은 현재 없어졌고...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용수골에 위치한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 사기막리 백자 도요지[용수골]는 1984년 10월 사천천 상류 지역의 관개용수용 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공사 시 주변 간이도로공사로 인해 도요지 유구가 파괴되면서 발견되었다. 이후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수습 조사되면서 소개된 유적이다. 그러나 발견당시 도요지의 수습 조사 이외의 조사는 이루...
-
조선시대 향촌 사회 운영을 주도한 세력. 사족은 조선 사회의 지배계층으로서 향촌 내에서 통혼권과 학맥의 형성, 농장 소유로 인한 경제적 토대 마련 등을 통해 지역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동시에 과거급제를 통한 정계진출과 조선시대 국가통치 이념인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지역사회에 구축하면서 향촌사회 운영을 주도하였다. 조선 초기에 향촌세력은 향리를 중심으로 한 이족과 고려 말 품관을...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사화산에 위치한 봉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남쪽으로 소동산(所同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주문산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는 백두대간의 곤신봉에서 갈라진 동으로 벋은 지맥이 지금의 성산면 보현산[일명 대궁산][1,000m]을 거쳐 동쪽으로 낮아지면서 해안가에서 낮은 잔구 형태로 끝나는 봉우리에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갈매간길 8-3[금산리 620번지]에 있는 별당 양식의 한옥 목조 건축물.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는 김열(金說)의 아호(雅號)를 딴 임경당(臨鏡堂)이 두 곳 있다. 강릉 가까운 쪽에 있는 것을 임경당’이라 하고 마을 위쪽에 있는 것을 상임경당이라 하며 임경당과 구분하여 ‘진사댁’으로 부르기도 한다. 강릉시 성산면 영동대학에서 강...
-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 조선왕조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서원은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증설되었다. 서원은 사림의 장수(藏修)·강학(講學)의 장소이다. 사림들이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던 까닭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이 과정에서 재지사족층의 사회적 역할을 제...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자(字)는 망여(望汝), 호는 월주(月洲). 부(父)는 소동명(蘇東鳴), 조부(祖父)는 소억선(蘇億善), 증조부(曾祖父)는 소건(蘇建), 장인은 권식(權植)이다.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전적을 거쳐 1663년 정언·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
율곡 이이를 배향하기 위해 강릉 사족들이 세운 서원. 송담서원은 1624년(인조 2)에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왕현 왼편 아래쪽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630년(인조 8)에 완공되었다. 이때 강릉 유생 최언침(崔彦琛) 등이 청액(請額)을 상소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강릉 유생 김속(金涑) 등이 재차 청액을 상소하여 이해 3월에 사액되었...
-
조선 시대에 강릉부 북쪽의 사화면(沙火面)[지금의 사천면]에 있었던 제방. 제언이란 바닷물이나 강물을 막아서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 일부를 가로질러 막은 돌이나 흙으로 쌓은 둑을 말한다. 조선 시대의 토목 건설 공사는 대부분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담수하거나 수재 예방을 위한 제방을 쌓는 일이나 염전에 바닷물을 가두기 위하여 둑을 쌓는 일이다. 그 밖에도 영동 지역은 태...
-
강릉김씨 평의공파 선조들의 묘제를 위해 건립한 재실(齋室). 강릉김씨(江陵金氏) 평의공파(評議公派) 재실로 주변에는 평의공파 묘소가 다수 분포해 있다. 김지(金輊), 김자흠(金子欽), 김자장(金子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재실의 구성은 정면에 숭덕재, 좌우측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입구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 밖에는 숭덕재중건기념비(崇德齋重建記念碑)가...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신응명(辛應命)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7세 때 어머니의 머리에 종기가 나자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또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산에 들어가 사흘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16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혈기가 막히는 등 위독하자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으려 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신신기(辛申耆)의 손자이다. 평소 품성이 곧고 행동에 위엄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이가 많고 식성이 까다로워 날마다 맛 좋은 탁주를 마시고 신선한 국만 찾았는데, 신건동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갖추어 올려 드렸다. 비록 집안 살림이 가난해서 여기저기에서 빌려 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서 10여 년간을 계속하였다. 또 아버지...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홍문관 부제학을 지닌 신응시(辛應時)의 조카이고, 평사(評事) 신경연(辛慶衍)의 동생이다. 신경원(辛慶遠)은 1596년(선조 29)에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노닐며 시(詩)와 술을 즐겼다. 산천을 즐기던 신경원이 하루는 영남에 갔을 때, 그 곳 방백이 낙...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자는 용석(用錫), 아호는 명호(冥湖). 신윤형(辛尹衡)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신보상(辛輔商)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신응시(辛應時)로,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어머니는 정기(丁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예문관 등에서 관직 생활을 한 뒤 1591년 병조 좌랑으로 진주사(...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 고려 때의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증조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할아버지는 신자승(申自繩), 아버지는 신숙권(申叔權),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부인은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이씨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장인우(張仁友)의 부인, 둘째는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인 신사임당(申師任堂),...
-
조선 중기의 열녀. 본관은 평산이다. 아버지는 이사온(李思溫)이고 어머니는 최응현(崔應賢)의 딸이다. 이씨의 성품에 대해 이이(李珥)는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에서 “訥於言而敏於行 愼於事而果於善(눌어언이민어행 신어사이과어선: 말에는 서툴어도 행동에는 민활했으며 모든 것에 신중히 하되 착한 일에는 과단성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씨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
조선시대의 효자. 평생 어버이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자 신붕은 거적을 깔고 밖에서 잤다. 임진왜란 때 신붕이 어머니를 업고 난을 피해 가다 왜적에게 잡혔다. 그 때 왜적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신붕이 어머니를 안고 애걸하였다. 효성에 감동한 왜적이 이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렸다. 그 후 어머니께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평산. 주부(主簿) 신성하(辛聖河)의 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며칠을 더 살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장끼가 묘막에 날아들고 황작(黃雀)이 보금자리를 만드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또 산불이 났을 때 묘소 주위를 돌며 울부짖으니 불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 신세린(辛世麟)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사람들이 구해 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죽으려고 했지만 구조되어 죽지 못했다. 평생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날마다 피죽을 조금씩 먹을 뿐이었다. 봄가을로 남편의 새 옷을 지어 놓고 불살랐다고 한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 자는 사길(士吉), 호는 동해낭옹(東海浪翁). 삼척심씨로 시조로부터 8세손이다. 아버지는 심준(沈濬)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 아우는 심언광(沈彦光)이다. 1479년(성종 10)에 태어나 대과를 통해 관직에 출사하였으며 1556년(명종 11)에 세상을 떠났다. 1510년(중종 5)에 생원(生員)과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고, 151...
-
조선 중기 강릉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삼척. 자는 사형(士炯), 호는 어촌(漁村). 강릉 지역에 세거해 온 삼척심씨의 8세손이다. 사정(司正) 심충보(沈忠甫)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심문계(沈文桂)이다. 부친은 예조좌랑을 지낸 심준(沈濬), 모친은 강릉김씨(江陵金氏)로 사직 김보연(金普淵)의 딸이다. 형은 찬성을 지낸 심언경(沈彦慶)이다. 1487년(성종 18)에 태어...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안동김씨 시조에 대해서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이라는 설, 김숙승의 손자인 김이청(金利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안동김씨 세보』에는 김이청의 증손이며 고려조 명장인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강릉 입향시조는 김방경의 9세손인 김기(金沂)이다. 김기의 자는 영이(詠而)이고 조선 개국...
-
조선시대 강릉의 효자. 80세 때 집안사람 모두가 염병에 걸렸다. 그때 그의 아버지 안운(安雲)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
가신(家神)에게 복을 빌고 재액이 없기를 기원하는 제사. 매년 정초에 성주신(성조)에게 한 해 동안 집안의 평안,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을 기원한다. 안택제는 정초와 추수가 끝난 10월 혹은 동짓달에 하며 해마다 하는 집도 있고 일 년에 두 번, 3년에 한 번씩 하는 집도 있으며, 한옥일 경우에는 대들보 중앙에 상을 차린다. 사업을 하는 집에서는 번창을 기원하는 뜻에서 매년 지내는...
-
약재를 분류하여 넣어 둘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서랍이 달린 장. 보통 70~100개의 서랍이 달려있는데, 200개가 달려 있는 것도 있다. 각각의 서랍에는 안에 들어 있는 약재의 이름이 적혀 있고 고리쇠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약장의 기원이 언제쯤부터인지 밝히기는 어렵다. 농경생활로 접어들어 점차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집안에 기초적인 몇 가지 응급치료약을 비...
-
강릉 지역에 거주하며 본관이 양천(陽川)인 허씨(許氏).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으로 금관가야(金官伽倻) 김수로왕(金首露王)의 30세손이다. 허선문은 양천에 세거하면서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고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미를 제공하였고, 이에 왕건은 양천을 식읍으로 주고 가부(假父)라 하였다. 강릉 낙향시조는 허선문의 20세손인 허엽(...
-
조선시대의 열녀. 집이 가난하여 광릉(廣陵)에서 강릉도호부 봉평(蓬坪)으로 이사를 왔다. 이씨는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고, 남편 어주현(魚周顯)이 죽자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옷을 팔아 장례를 치렀다. 또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얼마 안 되는 토지를 팔아서 시아버지를 광릉에 있는 선영(先塋)에다 모셨다. 그 후부터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26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1487~1540]의 문집. 심언광은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삼척, 자는 사형(士炯), 호는 어촌(漁村),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1487년(성종 18) 3월 3일 강릉부 대창 용지촌에서 태어났으며,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심언광의 관력을 살펴보면 30세...
-
조선시대의 효자. 효도가 극진하여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 예를 다하였다. 백발이 되도록 경학(經學)을 공부했으나 과거에는 한 번도 급제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특별히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조선 중기 강릉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함양. 자는 여효(汝孝). 1648년(인조 26)에 생원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재령군수(載寧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철원부사(鐵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강릉부사...
-
역로(驛路)에 세워 통신, 숙박, 교통 기능을 담당하던 곳. 역은 역관(驛館),역참(驛站),우역(郵驛)등 다양하게 불리며 중국의 역전제도(驛傳制度)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역원제도가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시대 역의 명칭은 참(站 ),관(館), 합배(合排)등으로 불렸는데 세조 3년에 역승을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다가 1535년...
-
강릉 지역의 강에서 잡히는 꾹저구에 고추장, 된장, 버섯, 채소 등을 넣어 끓인 음식. 1580년(선조 13)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강릉 연곡 지역을 순방했을 때 주민들로부터 접대 받은 음식이 꾹저구탕이다. 그 당시 바람이 많이 불어 고깃배가 출어하지 못하여 연곡천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올렸는데 맛을 본 정철은 맛이 시원하고 담백...
-
최종집의 처인 삼척김씨(三陟金氏)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최종집의 처 삼척김씨의 효행을 본받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면 비문 제목은 “사인최종집처삼척김씨열녀비(士人崔宗集妻三陟金氏烈女碑”)이고 후면에는 비문이 없고 입석(立石) 연월일(年月日)도 마멸되어 있다. 삼척김씨 부인이 시집 온 지 두 달 만에 시부모가 무서운 전염병...
-
장진문(張振文)의 처 강릉김씨(江陵金氏)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정려각은 원래 강릉시 옥천동에 세워졌으나 장씨들이 고흥으로 낙향하면서 정려각을 가지고 가서 비(碑)만 남았었다. 1962년 강릉 시가지를 확장할 때 강릉김씨 옥가파(玉街派) 종중에 서 현재 괴당 김윤신 신도비 자리[남편인 장진문의 묘 반대편]에 이건하였으나 이 자리에 신도비를 이건하면...
-
조선 중기의 효자 신세린(辛世麟)과 열부인 처 강릉김씨 그리고 아들인 신붕(辛鵬)의 효행을 기린 효열비. 영산신씨 집안에서 조상의 효행과 절의를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각에는 2개의 비가 있으며 1기는 부모인 '효자 성균진사 공릉참봉 영산신공 휘세린(孝子 成均進士 恭陵參奉 靈山辛公 諱世麟) 처 열부 강릉김씨지려(妻 烈婦 江陵金氏之閭)'의 비석은 받침돌 위에...
-
영산신씨 신세린(辛世麟), 신세린의 처 강릉김씨, 신세린의 아들 신붕(辛鵬)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효열각. 신세린(辛世麟)의 처 김씨(金氏)는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구해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늘 애통하게 울면서 간장을 먹지 않았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신씨는 본래 중국에서 들어 온 성씨로 신시랑(辛侍郞)과 엄시랑(嚴侍郞)이 신라 경덕왕 때 파락사(波樂使)로 신라에 왔다가 당에서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돌아가지 못하고 영월에 들어와 정착한 데서 기원하였다. 신시랑의 후손인 영월신씨의 시조는 신경(辛鏡)으로 1138년(인종 16) 등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고성군수...
-
강릉에 거주하며 본관이 영일(迎日)인 성씨.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일정씨의 원조는 신라육촌(新羅六村의 하나인 자산진지부(觜山珍支部) 촌장인 지백호(知伯虎)이다. 지백호는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府)로 개칭되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지백호의 원손인 정의...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오근산에 위치한 봉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우계현 북쪽 2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어달산(於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해령산(海靈山)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 백두대간 중 강릉~임계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안부(鞍部)인 삽당령 바로 밑에서 동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점차 고도를 낮추어 뻗어오다가 북...
-
공자(孔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과 함헌(咸軒)을 제향하는 서원. 1777년(정조 1)에 어촌 심언광의 후손인 심상현(沈尙顯)이 어촌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주자의 영정을 계기로 하남영당을 중건하고 서원을 창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인(士人) 김형진(金衡鎭)은 그 영정(影幀)이 진상(眞像)이 아니라고 하면서 명륜당에서 재회(齋會)를 열어 반대한 후 권학준(權漢準...
-
조선시대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던 창고. 동창(東倉)·서창(西倉)·연곡창(連谷倉)·대화창(大和倉)과 더불어 조선 후기 영동지역의 세곡을 보관·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계창(羽溪倉)의 설치시기와 관련해서는 『현종실록(顯宗實錄)』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현종 13년의 기사에서 원양도의 양양·강릉·삼척·울진 등 네 고을에 산불이 거세게...
-
강원도 강릉시 두산동 월대산에 위치한 봉수대. 월대산 봉수는 해발 약 69m 높이의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봉수지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500m 거리에는 강릉 남대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남대천과 월대산 사이에는 논과 가옥들이 펼쳐져 있다. 월대산 봉수에서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과 논밭들이 연결되면서 동해 바다와 접하고 있고, 서편 역시 논들이...
-
조선시대의 충노(忠奴). 박영수(朴英秀)의 종이었으며 타고난 성품이 충직하고 공손하였다. 상전인 박영수의 상사(喪事) 때에는 6년을 하루같이 죽만 먹고 지냈다. 유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가 쌀과 미역으로 포상하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
조선시대의 효부. 시집 온 지 3년 만에 남편 유진구(兪鎭九)가 병이 났다.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남편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상제(喪祭)와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였다. 거상 기간에는 머리를 빗거나 세수를 하지 않아 얼굴에 검정을 칠한 것 같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퍼하였다. 하루는 산불이 남편의 묘에까지 번지려 하였는데, 하늘에 기도하니 잠시 후 비가...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윤옥진(尹玉珍)이며 어머니는 민윤(閔昀)의 딸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2년 뒤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 장령에 이어 교리(校理)·사간(司諫)·사성·검상·사인·동부승지·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어머니의 상...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황시령(黃是齡)이 일찍 죽어 나이 20세에 혼자가 되었다. 남자에게 욕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조카 황운학(黃雲鶴)의 집에 거처하면서 밤에는 열부(烈夫) 송씨의 집에 가서 자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충노(忠奴). 최빈현(崔斌鉉)의 종으로 상전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이 죽자 3년 동안 상식(上食)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렸다. 또 상전의 4대에 걸친 제사를 받들고 산소의 성묘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을득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강릉 우계(羽溪).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지역인 우계(羽溪) 출신으로, 중종 조 명장이었던 이지방(李之芳)의 아들이다. 명종 초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1555년에 전라도에 도적이 들어 10개의 진이 함락되었다. 이때의 병란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엄정하였으며, 그의 아들 이전(李戩)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
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남편 이돌만(李乭萬)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이웃 남자가 침입해 욕보이려 하였다. 죽기를 무릅쓰고 반항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이돌만의 처 이조이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조이(李召史)의 효열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李善彬)이 남의 묘터를 잡아준 일이 있었는데 이 묘터가 상가집 종인 개산(介山)의 아버지 묘와 가까워 개산(介山)이 이선빈에게 원한을 품고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급히 장사를 지내고 관가에 이 사실을 알려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개산(介山)이 끝내 자기가 지은 죄를 부인하자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도 명확한 사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7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을 때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임종할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두어 얼마동안 더 살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동수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천거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
-
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가 몇 달 동안 병석에 있을 때 배설물을 맛보고 치료하였으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렸다.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 땅을 파서 샘물을 길어 썼는데, 시묘살이를 마치고 묘막을 철거하던 날에 그 샘물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이동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표창을 하고 호...
-
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남편 이면기(李冕箕)의 병이 심했을 때 지극정성으로 하늘과 땅에 기도를 올렸다. 끝내 남편이 죽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늙은 시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겉으로는 슬픔을 참으며 남몰래 홀로 울다가 잠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목숨을 끊었다. 이면기의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해. 이연(李壖)과 형제 사이로 조선 전기의 효자 이양무(李良茂)의 후손이며, 이당(李堂)의 사촌 동생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어머니를 소생시켰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오래 고생하자 의관을 풀지 않고 밤낮으로 간호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이름·생일·죽은 날·자손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은 판석.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아버지는 최수당(崔壽塘)이고 어머니는 비인현감(比仁縣監)을 지낸 신수(辛守)의 딸이다. 조부는 통훈대부금구현령(通訓大夫金溝縣令)을 지낸 최세충(崔世忠)이고, 증조는 가선대부형조참판(嘉善大夫刑曹參判)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이다. 이무강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강원도 강릉시 우계 출신인 이지방(李之芳)의 후손이며, 중추부사를 지낸 이전(李戩)의 손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에 나주판관이 되었다. 1593년에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에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 1595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 아버지는 이오(李璈)이고 어머니는 채흥후(蔡興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과거에 올라 벼슬이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645년(인조 23) 8월, 강백년(姜栢年)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전 직장(直長) 김충각(金忠慤)과 함께 건의하여 향현사를 세워 최치운(崔致雲)·최응현(崔應賢)·박수량(朴遂良)·박공달(朴公達)·최수성(崔壽峸)·최운우(崔雲遇...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대사헌을 지낸 이감(李戡)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이성헌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이업(李嶪)을 일찍 잃고 홀몸이 되자 피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받들었으며, 이가 드러나게 웃지 않았다. 3년 후에 삭망제(朔望祭)를 지냈으며, 이 때 손수 제수(祭需)를 마련하였다. 박씨는 나이 90에 이르도록 매번 슬퍼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업의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자는 덕형(德亨). 아버지는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된 이천(李蕆)이고 부인은 신사임당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아버지이다. 50세가 되던 해에 음직(蔭職)으로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었고, 그 후 내섬시(內贍寺) 주부(主簿)·종부시(宗簿寺) 주부·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휘하에 잠시 있었다. 이기는...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남편은 이은진(李殷震)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었으나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셨다. 어느 날 저녁 사나운 도적이 침입하자 시부모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김씨는 도적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고 시부모를 감싸 보호하며 안정시킨 뒤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은진(李殷震) 처 김씨에 대한 효열...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형으로 이선(李璿)과 이번(李璠)이 있고, 아우는 옥산 이우(李瑀)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 오죽헌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이다. 아버지는 이응명(李應命)이며, 효자 이지헌(李之憲)의 아우이다.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사흘간 성복(成服)을 마친 후에 형과 함께 창칼을 들고 호랑이를 찾아 나서서 결국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효행이 관부에 알려져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무신. 이지방(李之芳)은 1496년(연산군 2)에 무사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 등과 함께 서정장수(西征將帥)에 임명되었다. 후에 종성·회령의 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내고, 1516년(중종 11)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왕비 윤씨(尹氏)의 책봉에 대한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이응명(李應命)이고, 아우는 이지면(李之冕)이다. 아버지 이응명(李應命)이 호랑이에 물려 죽자 아버지 상을 치르고 동생 이지면(李之冕)과 함께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를 발견한 두 형제가 재빨리 호랑이 앞으로 돌진하자 호랑이는 땅에 엎드렸다. 이 때 이지헌과 동생 이지면은 가지고 있던 창과 칼로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15세 때 두 살 아래인 아우 이취번(李就藩)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산에서 밭을 매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태번이 호미로 호랑이를 내려치고 이취번은 어머니를 껴안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호랑이가 끌고 가던 어머니를 버리고 머리를 수그리고 가 버렸다. 두 형제는 어머니를 업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죽음...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미상. 형은 이후(李垕)이고,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은 이당(李堂)이 아우이다. 형 이후와 함께 문장에 뛰어나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는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는데, 일찍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임영(臨瀛)에서 시율에 능한 사람은 오직 이학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미상.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은 이당(李堂)과 이학(李壆)의 형이다. 동생 이학과 함께 문장에 뛰어나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났다. 또한 과거시험의 폐단을 지적하고 스스로 앞장서서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밤낮으로 자기를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다.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려 여러 번 회생시켰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삼이나 바 또는 새끼 등을 두세 겹으로 단단히 꼬는 데 쓰는 연장. 실 따위를 감았다 풀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얼레를 일컫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돌물리 영산’·‘바자우이’·‘동들개’라고도 불린다. 삼이나 새끼를 꼴 때 사용한다. 농가에서 짚으로 새끼를 꼴 때 손으로 굵은 새끼를 꼬아 만들기가 어렵기에 자새를 이용하여 굵은 줄을 만든다. 미리 손으로 꼰 가는 새끼를 헛간...
-
조선 중기의 열녀. 남편은 장진문(張振文)이며, 장철견(張哲堅)의 아들이다. 나이 겨우 20세에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었다. 과부가 된 후에는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치아를 드러내고 웃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으로 남편의 신주(神主)에 음식을 올렸다.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거르지 않았고 끝까지 효성을 다하였다.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후손이며, 장철견(張哲堅)의 아들이다. 중종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1534년(중종 29)에 조상현(曺尙賢)에 이어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권귀(權貴)에 아첨하지 않았다. 1547년(명종 2)에는 효릉시능관(孝陵侍陵官)을 지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정선(旌善). 자(字)는 낙숙(樂叔).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전성명(全性命)의 아들이며 외조부는 권송(權悚)이다. 1517년(중종 12)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에 발탁되었다. 1531년(중종 26)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함흥판관(咸興判官)·강동현령(江東縣令)·평산부사(平山府使)...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정선(旌善). 자(字)는 원경(元卿). 통덕랑(通德郞) 전계현(全繼賢)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1528년(중종 2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있을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금으로 주조한 향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그 후 풍천(豊川)·정선(旌善)·원주(原州...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순인(全舜仁)의 가계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 전순인의 자는 원경(元卿), 아버지는 전계현(全繼賢), 어머니는 삼척심씨 심양보(沈梁甫)의 딸이다. 어촌 심언광, 삼가 박수량과 교유하였다. 1519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비문은 강릉부사를 지낸 박종정(朴宗正)이 지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심보영(沈普永)이 글...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39세에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다. 겨울과 여름이면 남편의 옷을 손수지어 무덤 앞에서 태웠으며, 평생을 상중(喪中)에 있는 것 같이 지냈다. 남편 생전에 많은 돈을 남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채권을 모두 거두어 불살라 버렸다. 그 뒤에는 살림이 가난하였으나 성품과 행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지체는 낮았으나 정절(貞節)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하거(荷渠)·승성자(乘成子)·석중도인(石衆道人). 조선 중기 여러 관직을 겸한 행정가이며 중앙과 지방행정에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관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상주에 도남서원을 세우는 등 예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
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강릉. 남편은 정곤(鄭鵾)이다. 집에 불이나 시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미처 나오지 못하자 불길을 무릅쓰고 뛰어 들어가 시어머니를 껴안고 나오다 함께 죽었다. 관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정려각(旌閭閣)은 강릉시 옥계면 성촌(城村)에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며,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曺植)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듬해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
조선시대의 효자. 영일(迎日)정씨(鄭氏)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이 심해지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다섯 달 동안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효험이 있어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죽만 먹었으며, 상복을 벗지 않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늙어서도 조금도 게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천장(天章), 호는 낙전당(樂全堂).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참봉(參奉) 정충원(鄭忠元)의 아들이다. 강릉 말산리(末山里)[지금의 강릉시 두산동]에서 태어났다. 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삼척 초분리(草紛里)로 이주하였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고, 1544년(중종 39)에 별시 문...
-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서(景瑞). 시조는 정습명(鄭襲明)으로 5대손인 정귀종(鄭貴宗) 대에서부터 삼척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지낸 정두형(鄭斗亨)이고 어머니는 김세정(金世貞)의 딸인 김씨이다. 1536년(중종 31)에 태어나 1609년(광해군 1)에 세상을 떠났다. 천성이 순수하고 기질이 온화하였다. 1568년(선조 1)에...
-
조선 중기의 문인인 정란(鄭鸞)의 경력과 인품을 기록한 묘지(墓誌). 정란은 1568년(선조 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부친은 정두형(鄭斗亨)으로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전충사(全忠祠)에 있다. 개자판(蓋磁板)은 가로 15.2㎝, 세로 21.8㎝, 두께 3.3㎝이며, 저자판(底磁板)은 가로 14㎝ , 세...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부모님이 병이 들자 변을 맛보며 치료하는 등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물을 긷다가 물고기가 함께 올라와 잡아다 드렸더니 부모님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조에서 표창을 내렸고,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부모님의 병환이 위독할 때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는 등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예를 다하여 참배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찬양하였으며, 부영(府營)에서 표창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다 부모에게 드렸고, 병환이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간호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관에서 효행을 표창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贈職)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조(士朝), 호는 화곡(華谷)·벽은(薛隱). 아버지는 좌의정 인성부원군(左議政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고, 어머니는 문화류씨(文化柳氏)로 류강정(柳强頂)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2년 7월 의주행재소에서 실시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 20여 년에 걸쳐 아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 효자로 이름 높았던 정종현(鄭宗玹)이 형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9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상막(喪幕)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으며 따뜻한 방에 거처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과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묘소 옆에 평소 어머니가 즐겨 드셨던 고사리가 나자 이를 캐어 아침과 저녁으로 올렸다. 부영(...
-
조선시대의 효자. 아우인 정종수(鄭宗琇)와 함께 두 형제가 모두 효성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어버이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14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과 함께 상막(喪幕)을 지켰으며 따뜻한 방에 거처하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에는 형제가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형제의 효행이 알려져 부영(府營)에서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
-
조선시대 강릉 지역의 장수 인물. 사마시에 올랐으며, 성품(性稟)이 온화하고 기품이 있어 화려함을 따르지 않았다. 매화와 대나무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으로 여가를 보냈다. 94세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3대에 걸쳐 추증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 충정공 조계상(曺繼商)의 후손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고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할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순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조순진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학자. 본관은 풍양(豊壤). 풍양군(豊壤君) 조신혁(趙臣赫)의 후손이다. 조시달(趙時達)은 일찍이 경학(經學)과 『사기(史記)』를 익혔다. 『예서(禮書)』를 두루 보고 『사례촬요(四禮撮要)』를 저술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에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였다. 조시달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가례(家禮)에 대하여 일가...
-
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목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자 흑질백장(黑質白章)이라는 뱀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방으로 구했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손수 숲속 바위틈을 찾아다니며 큰 뱀이나 구렁이가 흑질백장과 비슷하면 무조건 잡아다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와 같은 일을 4~5년 동안 계속하였다. 조영기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
조선시대의 효자.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도저히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잉어를 직접 잡기로 하고 동생 조정주(趙鼎周)와 함께 강가에서 단단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결국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잉어를 잡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잉어를 아버지에게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조...
-
조선시대의 효자. 부모를 봉양하는 데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어머니가 9개월 동안 중병에 시달리자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100일 동안 치성을 드려 어머니를 낫게 하였다. 조진묵(趙晉黙)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효자라 칭송하며 부영(府營)에 보고하였다. 부영(府營)에서 표창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충정공(忠貞公) 조계상(曺繼商)의 증손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이 전생직장(典牲直長)에 이르렀다. 조철(曺哲)은 임진왜란 때에 벼슬을 버리고 경포에 숨어 살았다.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헤어지면서 시를 짓기를 “석잔 술에 헤어지는 노래 한 곡조, 그대를 보내고 경포 가로 돌아가네. 이별의 정한을 알 리가 없어, 술잔을 거듭 잡고 나눈...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진사 조영진(曺英振)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나 부모에게 아침 저녁 문안 인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모가 병이 나자 약을 구하러 100리 밖에까지 나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며 앞길을 인도하여...
-
조선시대의 열녀.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志)』에는 주문진 나루에 살았던 여성 옥도가 절개를 지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옥도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나이 20세에 일찍이 남편을 잃었다. 부모가 그를 불쌍히 여겨 다른 곳으로 재혼을 시키려 하였으나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거절하였다. 머리를 삭발하고 얼굴에는 먹칠을 하는 등 스스로 추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머리가 자라면...
-
조선시대의 열녀. 이완이(李完伊)의 처인 주문진 해녀 섬이는 나이 겨우 열일곱 살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었다. 그 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몰래 혼자서 머리를 깎고 7일간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다.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개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고 겨우 살아났다. 유복녀가 한 명이 있었는데 이 딸이 시집을 간 뒤까지...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리에 있었던 봉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양야산(陽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화산(沙火山)에 응하고, 연곡현 북쪽 12리에 있으며 부와는 42리 거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는 백두대간 중 오대산에서부터 동으로 갈라진 지맥이 양양부와 경계를 이루다가 약간 남동쪽으로 꺾여...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창녕조씨의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계룡(曺繼龍)이다.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德曼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강릉에 입향한 시조는 부원군파(府院君派)의 후손인 직장공(直長公) 조철(曺哲)과 창산군파(昌山君派)의 후손인 조학서(曺鶴瑞)이다. 조학서(曺鶴瑞)는 임진왜란 때 중...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옛 절터. 청학사지는 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 입구의 삼산초교 소금강분교장에서 서쪽으로 약 1㎞ 쯤 떨어진 절골에 남아 있다. 청학사에 대한 내력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관련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살필 수는 없다. 다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寺刹條)에...
-
조선시대의 열녀. 향리(鄕吏)인 최광봉(崔光鳳)의 딸이다. 남편은 향리 이양면(李樑面)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었다. 정선(旌善)의 향리 이양면에게 시집을 갔으나 혼례를 올린 지 닷새 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 염습할 옷을 손수 짓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반 년 동안 시부모님을 정성을 다하여 모시다가, 어느 날 남편 무덤에 가서 종일 울다가 돌아와...
-
조선시대 강릉 출신의 효자.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최승원(崔承源)이고 동생은 최두령(崔斗齡)이다. 강릉 지역의 향리였다. 효성이 지극해 생부(生父)와 양부(養父)를 위하여 3번이나 손가락을 끊었다. 성산(城山) 백양동(白楊洞)에 있다고 전해지나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706년(숙종 32) 어사(御使) 오명준(吳命峻)의 별단서계(別單書啓)로 정려...
-
조선시대의 열녀. 목릉(穆陵)[선조의 능] 참봉을 지낸 남편 최맹인(崔孟仁)이 죽자 40여 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슬피 울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다. 최맹인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 강릉의 향리(鄕吏). 본관은 강릉. 향리로서 90세를 살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다. 최성복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세건(崔世楗) 처 김씨의 성명·생몰연월일·자손의 성명 등을 기록한 돌. 최세건 처 김씨는 강릉김씨로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남편 최세건은 승문원 교리 최자점(崔自霑)의 아들로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 최세건 처 김씨는 1457년 출생하여 1535년 9월 1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1535년 11월 30일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개지(介之), 호는 매창(梅窓).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손자이며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의 셋째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소과에 입격하고,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506년(중종 1)에 왕에게 상소하여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이어 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세충(崔世忠)의 생애와 행적 등을 기록한 비. 최세충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익찬주부(翊贊主簿),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의 관직을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조산 강릉최씨 선영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자판(蓋磁板)은 가로 26.5㎝, 세로 37㎝, 두께 2.3㎝이고, 저자판(底磁板)은 가로 27....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손자이고,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아들이다. 부인은 철원최씨(鐵原崔氏)로서 승지(承旨)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아들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은 강릉 12향현(鄕賢) 중의 한 사람으로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지낸 최세충(崔世忠)이 형이며, 호조판서를 지낸 최세절(崔世節)이 아...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강릉최씨 필달계(必達系) 용연동파(龍淵洞派)의 파조. 자는 청수(淸叟). 강릉최씨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의 20세손으로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지평현감(砥平縣監)을 지낸 최세번(崔世蕃)이다. 어머니는 이계저(李季著)의 딸이다. 현량과(賢良科)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낸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였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강릉.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이다.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증조는 최치운(崔致雲), 조부는 최응현(崔應賢),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이고, 어머니는 철원최씨 승지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 조광조는...
-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효자. 본관은 강릉. 호는 수림(秀林). 강릉 향현사에 제향된 최수성(崔壽峸)의 사촌이다. 1555년(명종 10) 함헌(咸軒)·최운원(崔雲遠)·최운우(崔雲遇) 등과 함께 오봉서원(五峰書院)의 건립을 발의하고, 감사(監司) 윤인서(尹仁恕)와 부사(府使) 홍춘년(洪春年)의 협조를 받아 이듬해에 오봉서원을 건립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상을 당했을 때...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이조참판을 지낸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치료를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3년상을 지냈다. 최수정(崔受禎)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부(孝婦). 본관은 미상이고,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남편의 이름은 최시부(崔始溥)이다. 병이 들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80세의 할머니를 위해 9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하였다. 또한 이가 빠져 음식을 먹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젖을 짜서 미음에 섞어서 먹이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7개월을 더 살...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姓)은 박씨(朴氏)이다. 남편의 이름은 최신규(崔信珪)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으며, 남편 최신규가 죽자 12년 동안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추우나 더우나 매일 한결같이 성묘를 하였다. 최신규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최세건(崔世楗)이며, 어머니는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를 거쳐 1525년(중종 20)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저작에 올랐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고 설서·사서를 거쳤다. 1531년(중종 26)에 김안로(金安老)의...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초명(初名)은 최의집(崔義集), 자는 일신(日新), 호는 누곡(樓谷). 호조참판을 지낸 최구담(崔具曋)의 아들이다. 1639년(인조 17) 생원시에 입격하고, 1651년(효종 2) 식년시 병과로 급제하여 통예정랑(通禮正郞)에 제수되었다. 후에 보안(保安)과 고산(高山)의 찰방(察訪)을 거쳐 예천·안산·정선·안성·양양의 수령을 지냈다. 벼슬이 동지중...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최우일(崔宇一)이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슬퍼하는 기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시부모의 묘소에 가서 절을 올려 하직인사를 하고, 친정에 돌아가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말로 부모님을 위로하였다. 그런 뒤 유서를 써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음독자살을 하였다. 어사(御使) 조홍진(趙弘鎭)의 장계(狀啓)로 호역(戶役...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최운광(崔雲廣)이다. 나이 30이 채 못 되어 남편이 죽자 매우 슬퍼하였으나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또한 남편의 제삿날이 되면 가난한 살림에도 제물(祭物)을 깨끗하고 풍성하게 마련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대중(大中), 호는 내한(內翰). 고성군수를 지낸 최자점(崔自霑)의 증손이며, 최해(崔瀣)의 아들이다. 부인은 권화(權和)의 딸로서 효행이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입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감찰(監察)을 지냈다. 『내한유고(內翰遺稿)』가 있다....
-
조선 중기의 효부. 본관은 안동. 권화(權和)의 딸이다. 남편은 최운부(崔雲溥)[1548~1575]이다. 남편을 따라 서울에 가 있을 때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기도를 올린 뒤 손가락을 끊어 종에게 주어 급히 강릉으로 가도록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머리를 빗지 않고 소금을 먹지 않았다. 밤낮으로 울며 직접 음...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자는 성중(盛中), 호는 사가당(四佳堂)·지곡(芝谷). 강릉최씨 문한계(文漢系)의 후손으로,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강성군(江城君) 최세건(崔世楗)이고, 부는 사재감 부정(副正) 최옥(崔沃)[1511~1572]이다. 형으로 최운흘과 최운준이 있고, 아우는 최운집이다. 아버지가 병환이 있을 때에는 변을 맛보며 보살폈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
-
조선 중기의 선비. 최운우(崔雲遇)는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교수 최담(崔澹)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姜氏) 참봉 강준지(姜俊智)의 딸이다. 진사 최호(崔浩)에게 입양되었다. 김광진(金光軫)에게서 수학한 최운우는 1552년(명종 7) 생원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
-
조선시대의 효자. 3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거의 죽게 되자 손가락을 씹어 그 피를 넣어드리니 하룻밤을 지나 소생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병간호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약을 구하러 다니다 하루는 어두운 밤길에 호랑이 꼬리를 밟고 지나갔으나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꿩이 저절로 날아들어 오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정려(旌...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다 섞어 올리자 병이 나았다. 1508년(중종 3)에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삼척. 남편은 최의규(崔義圭)이다. 남편이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앓다가 죽었다. 시신을 끌어안고 같이 누워서 먹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시신을 염(殮)하여 관(棺)에 넣고 벽에다가 혈서로 “남편이 굶주려가며 지은 농사를 내 어찌 혼자 먹으며, 남편이 수고롭게 지은 집에서 내 어찌 혼자 살겠는가” 라고 쓰고는 남편을 따라 죽었다....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강릉(江陵).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최주명(崔柱溟)이다.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으로 진사에 올라 일찍이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풍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사림(士林)에서도 뛰어나 고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1661년(현종 2)에는 향인들과 함께 향교를 새롭게 중수하였다. 최재태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첨추(僉樞) 최익록(崔益祿)의 아들이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죽을 먹었고, 국상(國喪)과 인산(因山)에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최정검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 조흥진(趙興鎭)은 최정검의 효행을 듣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사림에서 여러 번 관에 호소하여 “...
-
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두 달 만에 남편 최종집(崔宗集)이 괴질에 걸려 죽고 연달아 시부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슬픔이 지나쳐 몸이 수척해졌으며, 빗질을 하지 않고 옷과 이부자리에 때가 끼어도 빨지를 않았다. 첫 번째 부인이 낳은 아이를 잘 길러 남편의 뒤를 잇고자 하였으나 그 아이마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삿날에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상막에 들어가 제상 앞에서 독...
-
조선시대의 열녀. 예도가 밝았으며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 최종학(崔鍾鶴)의 병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반나절을 더 살게 하였다. 최종학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서 단자를 부영(府營)에 올려 포상을 받았고 요역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최치운의 후손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집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사천(沙川) 용연동(龍淵洞)에다 장사를 지냈으며,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하루는 새벽에 성묘를 갈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 앞까지 길을 인도하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매번 호랑이가 앞서서 집 근처까지 인도하...
-
조선시대의 열녀. 28세 때 남편 최찬구(崔燦九)가 죽자 슬픔이 지나쳐 여러 번 기절을 하였다. 심씨는 대상(大祥)과 그 다음 달에 지내는 담제(禫祭)를 마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최찬구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아름다운 행실을 찬양하였으며,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최찬구 처...
-
조선시대의 효자.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고을의 의원이 살펴보더니 “사람의 이가 가장 좋은 약이다.”라고 말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창효는 곧바로 자신의 이 세 대를 뽑았다. 그리고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 어머니의 상처에 발라 어머니를 살렸다. 최창효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최운상(崔雲祥)의 병이 위급할 때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최충남(崔忠男)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충남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9년(명종 14)에 정려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효자. 22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최태민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태민(崔泰旻)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효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점차 자라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통탄하였다. 그러다 어머니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할 때 관을 보고 통곡하였다. 그 후 처음 상을 당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3년 상을 치렀다. 최택항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최택후(崔宅垕)의 병이 위급하자 이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다시 소생했지만 오래지 않아 죽었다. 이씨는 남편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을 하다 기절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약을 써서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3년 동안 눈물로 지내면서 상을 마쳤다. 그 후 옷단장을 하지 않고 나물밥을 먹으며 14년 동안 문밖출입을 삼가...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향리 출신으로 효자 최두상(崔斗相)의 현손이다. 성품은 굼뜨고 우직스러웠으나 효성만은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의원이 뱀의 기름을 쓰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빌고는 백방으로 뱀을 구하려고 다녔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뱀을 구할 길이 없어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하루는 까마귀 한 마리가 지...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회생시켰다. 아버지가 뱀에 물렸을 때에는 뱀을 잡아 그 허리를 씹어 피를 뽑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리자 즉시 나았다고 한다. 사림에서 지극한 효성에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교리(校理) 최자점(崔自霑)의 후손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옷깃을 부여잡고 슬퍼하였으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를 하였다. 또한 집안 살림이 가난해도 몸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시묘살이를 하면서 채식만...
-
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으며,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매일같이 슬퍼하며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수 약을 지었으며, 밤에는 촛불을 켠 채 부채를 부치며 간호를 하였다. 남편이 죽자 초종(初終)을 치른 후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자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로 평생 머리에 빗질과 세수를 하지 않았으며, 90세가 가까...
-
강릉최씨 용연동파조(龍淵洞派祖) 최수담(崔壽潭)[1499~1582]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강릉시 사천면 중앙서로 865-8[사기막리 825번지]에 있다. 추모재는 강릉최씨 필달계 용연동파(龍淵洞派) 종친회 소유다. 최수담의 자는 청수(淸叟)이며, 공조참의에 증직되었고 강릉최씨 용연파조(龍淵派祖)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지평현감(通訓大夫砥平縣監)을 지낸...
-
조선 중기의 충노(忠奴)였던 문리동(文里同)의 비석. 문리동은 관노로서 임진왜란 당시 강릉부사 이광준(李光俊)을 모시고 전란을 피하여 헤매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흩어진 나락을 주워 연명하게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사를 섬겼다. 주민들이 충성을 다하여 주인을 섬긴 문리동의 행실을 갸륵히 여겨 비석을 세웠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에 있었던 명주군청 안에...
-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재지 씨족집단의 성씨에 대한 총칭. 강릉은 토성들의 재지적 기반이 강했던 지역이다. 토성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향리출신으로서 여말선초에는 신흥사대부를 성장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 초기 강릉 지방 성씨에 대해 “토성이 여섯이니 김(金)·최(崔)·박(朴)·곽(郭)·함(咸)·왕(王)이요, 사성(賜姓)이 하나이니 옥(玉)이...
-
몸에 지니는 장식물을 보관하는 함. 물건을 보관하는 나무상자로는 궤(櫃)와 함(函)이 있다. 궤와 함은 굳이 구별하자면, 함은 소형상자로서 뚜껑이 위에 있거나 그 후면에 경첩을 단 것이고, 궤는 함에 비하여 비교적 대형이며 문판이 앞면에 부착되거나 뚜껑을 위에서 씌우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몸에 지니는 장식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 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조선말기의 유물 1...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강릉 지역에 거주하는 평해황씨는 중국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한학사(漢學士) 황락(黃洛)의 후손들이다. 황락은 사신으로 월국(越國)으로 가는 도중 표류하여 경상북도 평해 월송정 인근에 상륙하였다. 황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황갑고(黃甲古)는 평해황씨 시조, 둘째 황을고(黃乙古)는 장수황씨 시조, 황병고(黃丙古)는 창원황씨...
-
곡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따위를 날리는데 쓰이는 농기구. 지방에 따라서 풍로, 풍차, 풍기, 팔랑개비 등으로 불리며 형태도 다양하다. 박지원(朴趾源)의 『과농소초(課農小抄)』에 “내가 경상도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풍구를 만들어 시험해보았더니 어린아이 하나가 이에 기대서서 발판을 약간 밟아도 100섬이나 되는 낟알을 하루에 다 부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와요지. 강동면사무소에서 마을 길을 따라 동쪽으로 700m 가량 내려가 서당 뜰을 건너면 박태균 씨 집이 위치하고 있다. 박태균 씨 집 앞쪽 구릉의 서북쪽 끝 부분 무덤가와 도로가에 위치한다. 기와 조각과 와요지 소토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
강릉 부사를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심원(深源). 한영삭(韓永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유(韓愈), 아버지는 한충례(韓忠禮)이다. 1503년(연산군 9) 별시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였다. 장령을 거쳐 1510년(중종 5)에 강릉 부사로 재직하던 중 관물(官物)인 면포(綿布) 1백 50필로 양곡을 산 일이 발각되어 장오죄(贓汚罪)로 파출당하고, 추문(推...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함상현(咸商鉉)이다.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남편에게 아내의 도리를 다하여 섬겼다. 시집간 지 10년이 채 못 되어 남편이 병이 나자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정화수를 떠 놓고 자신이 대신 앓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남편이 죽자 시신을 거두어 놓고 밖으로 나가 약을 먹고 죽었다. 군(郡)에서 그릇에 표를 새겨 포상을 하였...
-
조선시대의 무신. 본관은 강릉. 형조판서를 지낸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1360~1410]의 현손(玄孫)이다. 별시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감찰과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지냈다....
-
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뛰어나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가면서 병세를 살폈고,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산꿩을 먹고 싶다고 하자 이튿날 새벽 뜰 안에 있는 살구나무에 꿩이 날아들어 활로 쏘아 잡았다. 사람들이 효성이 지극한 탓에 꿩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숙종 때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문명(文命), 호는 송담(松潭).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이어 고부군수·군기시부정·나주목사를 거쳐, 1451년(문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457년(세조 3)에는 공주목사·함길도관찰...
-
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함윤근(咸潤根)이다. 남편이 과거를 보러가다 중도에서 병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니 깨어나 며칠을 더 살았다. 남편이 죽자 같이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시아버지가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편의 상을 마친 후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삼강록(三綱錄)』에 그 효행이 실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함윤근(咸允根)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대신 앓겠다고 빌었다. 의원이 뱀탕이 효험이 있다고 하자 수천 마리를 잡아다 약을 지어 드렸다. 아버지가 붕어회를 먹고 싶어 하여 웅덩이를 파니 본래 붕어가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마리의 붕어를 얻을 수 있어 이것을 잡아다 드렸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서는 3년간 시묘살이...
-
조선 중기 강릉에서 교수를 지낸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칠봉(七峰).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정평공(貞平公) 함부림(咸傅霖)의 5세손이며, 강릉 성산(城山) 건금리(建金里)에서 아버지인 부호군 함좌무(咸佐武)와 어머니 강릉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31년(중종 26)에 24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李滉)과 동학...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령산에 위치한 봉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남쪽으로 오근산(五斤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동산(所同山)에 응하고 부동쪽 2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고 안인포(安仁浦) 북쪽에 자리 잡은 평탄지상에 위치한 잔구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해령(海令)으로,...
-
강릉 지역 재지 사족들 간의 갈등. 향전(鄕戰)은 군현(郡縣)의 재지 사족들 간의 갈등 관계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향전의 양상은 군현의 상황과 재지 사족의 입지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대개는 재지 사족과 문중 간에 군현의 주도권을 염두에 두고 전개된다는 특성을 갖는다. 1. 발단 강릉 지역의 향전은 이른바 ‘하남재시비(河南齋是非)’라고 한다. 이...
-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사당. 향현사는 강릉 지방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사람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을 삼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행하는 곳으로, 최치운(崔致雲) 등 6인을 배향하고 있다. 강릉 향현사 건립은 이 지역 오봉서원이나 송담서원의 경우와 같이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관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향호리 발우봉에 위치한 봉수. 향호리 봉수에서는 사방이 트여 남으로 주문진 일대, 북으로 양양군 현남면 남애리의 양야산 봉수대까지 바라다 보여 봉수대의 위치로서는 매우 적합한 곳이다. 문헌에 따르면 북으로 양야산 봉수, 남으로 사화산 봉수와 응한다고 한다. 주문진-양양 간 국도 변의 향호교를 지나서 군부대를 돌아 서쪽으로 약...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학산(鶴山)·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엽(許曄)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이복형으로 허성(許筬)이 있고, 동복형제로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엽(許曄)의 아들이고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의 형이며, 허난설헌(許蘭說軒)의 오빠이다. 1568년(선조 1)에 생원이 되고, 1583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이 되어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변에 있는 평평한 암석. 조선 세조(世祖) 때 허종(許琮)과 이육(李陸)이 야인의 난을 평정하고 배로 동해를 지나다가 이곳에서 군대를 쉬게 했는데, 당시 강릉부사 허경(許熲)이 허종과 이육 두 사람의 성씨를 따서 허이대(許李臺)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 아들은 홍순대(洪順大)로서 역시 효행이 뛰어났다. 어머니가 고령(高齡)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항상 옆에서 부축하며 보살폈다. 어머니가 고기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자 울면서 빨아냈다. 또한 어머니의 병환에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으며, 위독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죽으니 70세의 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이며, 아버지는 업유(業儒) 홍봉산(洪奉山)이다. 효행이 뛰어났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홍순대(洪順大)에 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관청에서 홍순대의 지극한 효행을 듣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홍재무(洪在武)이다. 남편이 병이 나자 밤낮으로 자신을 대신해서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남편이 끝내 숨지자 몰래 뒤뜰에 나가 따라 죽었다. 유림에서 예조(禮曹)에 상소를 올려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홍재수(洪在壽)이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9년간이나 문둥병을 앓았는데, 밤낮으로 자신을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백방으로 구하여 올렸다. 시집올 때에 가지고 온 패물과 소를 팔아 남편의 약값에 썼으며, 남편이 죽을 무렵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다. 유림에서 부영(府營)과 어사에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예문관대교를 지낸 홍계정(洪係貞)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5년(중종 30)에 별시(別試)에 올랐다. 1555년(명종 10)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 1556년 강원도관찰사 윤인서(尹仁恕)와 전 부사 함헌(咸憲), 최운우(崔雲遇) 등과 함께 오봉서원(五峰書院)을 건립하였다. 오봉서원을 건립할 때에 윤인...
-
조선시대의 열녀.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으며 아내로서의 행실도 매우 뛰어났다. 시어머니가 죽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이 때 남편 황기윤(黃基倫)도 어머니의 상을 치르다 병을 얻어 위독해졌다. 매일 남편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나 남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며느리가 되어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시아버지께서는 저를 생각하지 말아 주...
-
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다시 살게 하였다. 그 후 어머니는 14년을 더 살았다. 황손길(黃遜吉)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박억추(朴億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박억추는 충렬(忠烈) 박제상(朴堤上)의 후손으로 훈도(訓導) 박윤량(朴允良)의 아들이며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의 조카이다. 이 가문에서는 박수량과 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과 같은 효자들이 배출되었으며 박억추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삼강행실』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