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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옛 청주읍성의 모습을 그린 채색지도. 청주읍성의 형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유이주공(公)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작성 시기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나 근거는 없으며, 다만 1794년(정조 18)에 수원 화성(水原華城)의 축조를 위한 평지성의 사례조사 목적으로 「청주읍성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청주읍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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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봉명사거리 북서쪽 부근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수리시설. 과상이란 주변에 과일 상점이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봉명사거리 북서쪽 부근에 있었던 수리시설로 영조 때 만들어져 최근까지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지명만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주치(州治)에서 서(西)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위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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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문화재는 크게 유형에 따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으로 나누고, 지정여부에 따라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로 구분한다. 청주시에는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문화재가 널리 분포되어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조선시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본영을 드나들던 출입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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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 즉, 무덤. 분묘란 흔히 묘 또는 무덤이라도 하고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나 시설로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을 고분이라 한다. 분묘는 각 사회의 장제(葬制)나 또는 내세관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또 자연환경이나 생업형태, 피매장자의 연령과 성별,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이르기까지 분묘의 형태와 습속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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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事蹟)을 기념하기위해 세우는 돌. 비(碑)는 보통 비석 혹은 석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석비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석비는 묘비와 탑비·능묘비 외에도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의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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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과 사창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저장미를 보관하던 창고 조선시대 지방관청 소속의 저장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던 곳으로,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청주목 소속의 창고는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이 읍성 안에 있었으며, 서쪽으로 미호천(美湖川) 연변에 신원창과 금성창이, 북쪽에 오근창, 동쪽 멀리 청천창, 남쪽 멀리 주안창이 있었다. 이들은 세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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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봉명동 799~801번지 부근에 있었던 조선시대 수리시설. 현재의 봉명동 799~801번지 부근에 있었던 수리시설로 『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주치(州治)에서 서(西)로 5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위가 552척이며 수심이 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명동 사거리 남동쪽 기슭의 봉명파크장 주변에 있었으며, ‘소댕이방죽’이라 불FL다가 1983년 주변이 택지 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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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인 석빙고가 있었던 자리. 석빙고는 조선시대 고을마다 있었던 공용의 얼음 창고로, 겨울철에 얼음을 떠서 저장하였다가 여름 더위 때 사용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하에 설치하였다. 냉매(冷媒)는 주로 소금과 겨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 때부터 있었으나 당시에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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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송절동에서 발굴된 원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매장·생활유적. 송절동 유적은 중부지역에서 확인된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고분유적 중의 하나이다. 1989년 4월 청주공업단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유적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후,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2년 11월~12월, 1993년 9월~11월의 두 차례에 걸쳐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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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에 있는 구석기시대 한데유적·매장유적·생활유적. 신봉동 구석기 유적은 봉명·신봉 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 추진 계획에 따라 조사한 5개 구역 중 Ⅰ지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산 10번지 일원에 위치하는 해발 88~102m지역이다. 조사면적은 약 1500㎡로 구획은 자북방향에 맞추어 4×4m의 발굴 구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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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매장유적. 청주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해발 60~115m쯤의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역 일대를(1,001,840㎡) 청주 봉명지구·신봉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 지구로 지정하여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 지역 일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청주시에서 주관하여 시행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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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청주 신봉·봉명동 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추진계획에 따라 1993년 11월~12월에 걸쳐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98년 3월~5월에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적의 성격·시대·분포범위 등에 따라 전체 조사대상지역을 Ⅰ~Ⅴ 지구로 구분하였다. 이중 Ⅳ지구는 원삼국기의 널무덤유고가 조밀하게 분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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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주 율봉역에 속한 역. 『청주읍지(淸州邑誌)』에 의하면 율봉역에 속한 역으로 청주에서 남쪽 16리에 있고, 역로는 청주율봉역-쌍수역-율치(栗峙)-문의 덕류(德留)역-형강(荊江)역, 주안(周岸)역-옥천 증약(增若)역으로 이어진다. 쌍수역에는 역리(驛吏) 40명, 역노(驛奴) 10명, 역비(驛婢) 7명이 있고, 상등마(上等馬) 4마리, 중등마(中等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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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박시설인 오근원이 있었던 자리. 상당구 오동동에 해당하는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본래 오근부곡의 옛터를 오근원이라 한다 하였다. 오근부곡은 청주의 북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청안현과 사십리 거리이고, 북쪽으로는 진천현과 삼십리, 서쪽으로는 목천현과 오십리, 남쪽으로는 청주와 삼십리 거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오근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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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오동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저장미를 보관하던 창고.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청주목 소속의 지방관청 소속의 창고로 동창(東倉)과 서창(西倉)이 읍성 안에 있었으며, 서쪽으로 미호천(美湖川) 연변에 신원창(薪院倉)과 금성창(金城倉)이, 북쪽에 북창인 오근창, 동쪽 멀리 청천창(靑川倉), 남쪽 멀리 주안창(周岸倉)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청주목에서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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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에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기관인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관리.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참은 군사·외교 외에 중앙집권을 유지하기위한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참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로의 조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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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교통기관. 역의 기능은 지방통치를 위한 공문서의 전달, 관품 세공의 수송 및 관원사행에 대한 마필의 공급과 숙식제공, 변방군정의 보고 등을 담당하였다. 율량도는 조선시대 41개의 역도의 하나로 조선시대의 역로에서 보면 주요간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분로(分路)였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경상도 성주에 이르는 길을 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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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숙박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인제원은 청주성 남쪽 6리에 있다.’라고 되어있고, 『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고을남쪽 6리에 있다. 16개의 원(院)이 옛날에 있었다. 옛터의 옆에 창(倉)을 세우고 객사를 두었다. 지금은 모두 폐하고 다만 신원(薪阮), 오근(吳根)이 사성(使星)을 보내고 맞는 장소이다.’고 한다. 현재 흥덕구 분평동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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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숙박시설 정진원(情盡院)이 있던 터 원(院)이란 전국 각 역(驛)에 둔 숙박시설로 정진원(情盡院)이 이에 해당한다. 원의 설치목적은 공무연락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공적임무를 띤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데 있었다. 정진원은 청주에서 회인-보은- 문의-부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숙박시설이었다. 정진원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남쪽 남석교 건너에 있었다. 『신증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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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의 서쪽에 있는 군사시설로 지휘관이 올라가서 명령하던 곳. 청주시의 인구증가와 국내외 관광객의 증가로 상당산성을 찾는 관광객이 대폭 증가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여 1995년부터 상당산성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조사지역은 산성동 산 28-1[성내로124번길 14] 임야에 속한 지역으로 서장대 터와 산성동 175번지, 산성동 177번지, 산성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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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는 한씨의 시조인 한란의 묘소.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이며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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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주관아(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구주오경제(九州五京制)를 갖추던 신문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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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의 남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남문로 2가 남단에 있는 청주읍성 남문터는 청남문(淸南門)이라 하였으며, 홍예문·문루·옹성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리어 성안에 있던 관아와 충청병영의 시설들도 없어졌다. 본래 남문 앞 옹성리(甕城里) 마을은 성안길의 남쪽 끝이며, 성곽도시였던 청주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남문터를 알리기 위해 1994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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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의 동쪽 문이 있던 자리. 청주읍성(淸州邑城)의 동문터는 개인문(開寅門 혹은 闢寅門)이라하였으며,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市區) 개정사업 때 헐리었다. 동문의 안쪽에는 감옥과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가까이 있었고, 홍살문을 지나는 큰 길이 청주목 관아와 연결되었으며, 문밖에는 잉어배미라 불리던 논과 그 동쪽으로 문외리 마을이 있었다. 성문 밖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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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의 북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북문로 1가와 2가의 경계에 있는 청주읍성의 북문터로 현무문(玄武門)이라고 하였으며, 홍예문과 문루, 옹성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렸고 북문 안쪽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는 수동으로 옮겨졌다. 1921년 북문 밖으로는 충북선 철로가 놓여졌었고, 지금은 청주의 중심로가 되었다. 1994년에 청주 문화사랑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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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의 서쪽 문이 있던 자리. 상당구 서문동 96번지에 있는 청주읍성 서문터는 서문동 오거리에서 성안길로 통하는 속칭 족발골목의 입구에 있다. 이곳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이 있었던 곳이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이른바 시구 개정사업으로 헐리었다. 서문의 안에는 충청병영이 있었고 문밖에는 대교천 즉 지금의 무심천(無心川)이 흘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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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의 여덟 군데의 명승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청주의 형승(形勝)은 동남쪽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고,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며, 물이 공(功)자처럼 돌고, 현사(懸寺)가 강에 닿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원팔경이라 하여 1경은 상당귀운(上黨歸雲: 상당산성에 둘러싸인 구름), 2경은 금천어화(金川漁火: 무심천(無心川) 고기 잡는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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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죽들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수리시설. 화죽제언은 청원군 북이면 화상리와 화하리에 발달된 화죽들에 만들어진 제언으로 화죽들은 석화천과 미호천(美湖川) 사이에 발달된 들이기 때문에 홍수로 여러 번 유실되었다. 이에 제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1760년(영조 36)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청주목의 63개 제언 중 화죽제언이 중요한 제언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