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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007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성정용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538년 사비 천도 이후 660년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도성.

[개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는데, 점차 국력을 회복함에 따라 무령왕이 “다시 강국이 되었음[更而强國]”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웅진도성은 급하게 천도하면서 너무 협소한 지리적 여건 등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사비도성은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국가 중흥의 염원을 담아 다시 강국이 된 국가의 위상에 걸맞은 곳을 찾아 계획적으로 천도한 곳으로 생각된다.

[사비 천도 배경과 계획]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와 함께 웅진 지역의 여러 상황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백제는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고 한성도 함락당하자, 불과 한 달여 만에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그런데 웅진은 금강이 도성 북쪽과 서쪽을 감싸고 곡류하며 동쪽과 남쪽은 험준한 산악에 의하여 보호받는 곳으로 지형상 방어에는 대단히 유리하지만, 가용 공간도 적고 풍수해에도 무척 취약하여 도성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던 이유는 고구려의 위협 상황 때문이었다. 금강 바로 북쪽의 부강에 있는 고구려 산성[남성골]의 존재는 고구려가 한성 함락 후 웅진까지 진출하여 백제를 위협하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사실 한강 이남에서 금강 이북까지는 개활지가 많아 고구려의 공격에 견딜 만한 지리적 장소가 없기 때문에, 한성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으면서 고구려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만한 곳은 금강 이남밖에 없다. 대전과 공주, 부여, 강경 정도인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지방 세력이 있는 곳이면서 방어적으로 교통과 물류 이동의 용이함 등을 두루 고려하여 선택한 결과가 웅진이었고 최우선적인 요인은 무엇보다 방어적 측면이었을 것이다.

기존 대통사 추정 지점보다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반죽동 222-1번지에 대한 조사 결과 통일 신라 시대 이후 개발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 일제 강점기 지형도에는 공산성과 정지산 사이가 흔히 ‘미나리꽝’이라고 불리는 저습지 형태로 표시되어 있어, 추정 대통사지부터 북쪽은 웅진기에 활용하기 어려운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웅진기에 주로 활용할 수 있는 도성 내부 공간은 대통사보다 남쪽의 남북으로 좁은 분지성 공간과 공산성 남쪽의 구릉 지대 정도이며, 공주를 둘러싼 험준한 산악 때문에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도 별로 없다.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국가의 가장 핵심적 공간인 도성을 위상에 걸맞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웅진은 한계가 너무나도 뚜렷하여 새로운 공간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사비, 현재의 부여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동성왕이 23년(501) 10월 “사비 벌판에서 사냥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사비 천도를 위한 준비 움직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동성왕 대부터 새로운 도성 건설의 꿈을 꿀 수는 있겠으나, 불과 한 달 후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지양해야 할 것 같다. 나아가 정변으로 인하여 왕위를 계승한 무령왕도 초기에는 천도보다는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사비 천도와 관련된 준비 기록은 전혀 전하지 않으나, 최소한 무령왕이 갱위강국을 선언할 즈음의 무령왕 대 후반 또는 늦어도 523년 즉위한 성왕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 천도는 웅진 천도와는 국가적 상황이 전혀 다르므로, 왕궁과 관아, 도로 등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천도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 최소한의 준비 기간을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새로운 도성으로서 사비 지역의 여건]

새로운 도성의 조건으로는 도성 건설에 충분할 만한 넓은 공간을 갖고 있으면서 방어에 유리하고, 나아가 한성이나 웅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수운의 편리함을 갖추고 있는 곳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천도는 단순히 도성을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 질서의 창출과도 관련이 있다. 천도는 기득권을 일정 부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현지 세력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 지역이 새로운 도성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위협이 상존하고 신라도 이미 문의와 청주를 비롯한 금강 동북쪽 지역으로 진출하여 있는 상황에서 공주보다 북쪽은 아예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자연스레 남쪽이나 서쪽에서 도성 후보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주 서쪽의 청양은 너무 고립되었고, 홍성은 방어의 이점이 없고 북쪽에 치우친 곳이어서 자연스레 공주 남쪽을 주목하게 되었다.

공주에서 남쪽으로 넓은 공간은 부여가 처음이고, 그보다 남쪽의 강경도 공간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공주 동남쪽의 논산과 동쪽의 대전 분지도 있었다. 그런데 논산이나 강경은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로 방어상 약점이 있었다. 또한 금산 장대리고분군에서 보듯이 신라가 6세기 중반부터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고려하면, 논산 일대는 신라와 접경하고 있었다. 또 대전은 너무 내륙으로 치우친 분지이자 고립된 지역이어서 방어상 이점은 있지만 백제의 새로운 국가 경영을 위한 곳으로서는 역시 부적합하였다. 결국 사비는 넓은 공간과 방어상의 이점, 수운 물류의 편리함, 새로운 지배 세력 형성에 유리한 점 등 여러 조건들을 종합하여 다른 지역들보다 절대적인 비교 우위를 갖고 있는 곳으로 백제의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던 공간이었다.

[계획 도시 사비와 외곽성의 축조]

부여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금강이 ‘⼕’형으로 곡류하며 흐르고 있다. 북·서·남쪽은 금강에 의하여 자연 해자처럼 보호받는 지형적 여건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동쪽만 항아리 입구처럼 트여져 있는 지형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동쪽 부분은 그리 험준한 지형이 아니어서 방어에 유리한 곳이라 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여 지역을 도성으로 선택한 후 방어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이 바로 기존에 부여 나성(羅城)이라 불리던 부여 외곽(外廓)의 축조였다.

부여 외곽은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증천을 따라 청산까지 이어지며[북외곽 구간], 여기서 동남쪽으로 꺾여 월함지를 지나 능산리 산[높이 116m] 정상부까지 진행하다가 다시 남향하여 왕포천을 건너 필서봉-염창리 산 봉우리[높이 134m]를 지나 남쪽의 백마강으로 이어지고 있다[동외곽 구간]. 길이는 무려 6.6㎞에 이르며, 저지대와 능선 구간을 교대로 지나며 각 지형에 맞게 축조되어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로 보아 부여 외곽은 동북쪽과 동쪽만 축조되었고, 서쪽과 남쪽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서성벽이 지날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의 서측인 백마강 연안 지대는 자연 지형상 높이 4~5m 내외의 미고지인데, 발굴 조사에서 성벽과 관련한 구조물 흔적이 없고 오히려 도성 내측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건물지와 도로 유구 등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구드래 지점에서는 현재 제방보다도 서쪽의 강변 둔치에서 건물지와 경작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일대에 서성벽은 애초부터 축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도성의 서·남쪽은 백마강이 자연 해자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곽 성벽은 기본적으로 내부는 토축(土築)으로 하고 외부는 석축(石築)으로 마감하여 완성된 모습은 석축성으로 보이도록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서 “석축으로 된 반월성(半月城)이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6.6㎞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토목구조물을 단기간에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백제가 고구려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뼈아픈 경험과 새로이 도약하는 국가 발전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곳으로서 사비가 선택되고 기획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비 외곽[나성]은 천도를 즈음하여 이미 기획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외곽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성벽 하층 및 성벽에서 출토된 유물 양상과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비 외곽은 방어를 위하여 축조된 측면이 강하지만, 이와 함께 기본적으로 도성 공간을 규정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즉 이 외곽을 기준으로 내부가 곧 도성 내부로서 왕궁과 관아·사원·거주 시설 등이 집중 배치되고, 외부는 동쪽 외곽에 가장 인접하여 있는 부여 왕릉원부터 시작하여 무덤들이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결국 백제는 사비기에 이르러 외곽을 기준으로 삶과 죽음의 공간을 명확히 분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성과 왕궁의 위치는?]

도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설은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왕성[궁]의 존재이다. 이와 관련하여 1980년대부터 연못과 저장 시설, 도로 등이 조사된 관북리 일대가 왕궁터로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관북리는 물론 쌍북리를 포함한 지역에서 성벽이나 궁장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관북리 일대를 조사한 결과, 관북리 일대에 7세기 무렵 대규모 성토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관북리의 대형 전각건물지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관북리 일대는 사비의 공간 확대 과정에서 집중적 개발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한원』 번이부 백제전의 “괄지지왈 백제왕성 방일리반 북면 누석위지(括地志曰 百濟王城 方一里半 北面 累石爲之)”의 기록을 토대로 부소산성을 다시금 사비 왕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주목하여 볼 수 있다. 부소산성의 동·서·남벽은 순수한 토축[판축]에 성벽 너비도 4.8m 내외로 사비 외곽보다 폭도 좁을 뿐만 아니라, 토심석축(土芯石築)으로 된 외곽과는 축조 기법도 전혀 다르다. 크기도 왕성을 ‘방일리반(方一里半)’으로 기술한 『괄지지』의 기록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어, 부소산성이 왕성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볼 수 있다. 2022년 군창지터에서 백제의 와적 기단 건물이 조사되고 있어, 향후 성 내부의 조사 결과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비도성의 개발 과정]

사비는 외곽의 구획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에 부소산성을 배치하는 등 도성 공간을 왕궁부터 주거 지역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설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비 도성 전체의 공간은 강변 충적지를 일부 제외할 경우 최대 가용 면적이 대략 13.7㎢ 정도 된다. 그런데 최근 쌍북리 두시럭골 유적과 가탑리 주거 유적에서 높이 27m 내외까지 건물지가 조사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대략 높이 30m 이상을 거주 구역에서 제외할 경우 가용 면적은 11.2㎢ 내외로, 공주의 가용 면적보다 무려 5~6 배 이상이나 된다. 도성 내부의 가용 공간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적 시설이나 지배층과 관련된 시설들이 들어설 공간이 넓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넓은 면적이 한 번에 개발될 수는 없다. 쌍북리에서 대가야계토기가 나오는 6세기 중반 무렵의 건물지가 조사되었음을 고려하면, 천도 초기에는 쌍북리 일대부터 개발되어 중요 시설들이 들어서고, 점차 관북리 일대로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략 6세기 후반 위덕왕 대 무렵과 7세기 전반 무왕 대 무렵에 대대적인 정비와 도성 내부 공간 확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사비기 이전의 유적들은 규모가 큰 것이 거의 없어, 일정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천도 이전에 사비 지역에 선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세력이 없는 곳을 천도지로 선택하였던 것 같다.

한편 『주서』 백제전에는 ‘도하유만가(都下有萬家)’라는 구절이 있는데, ‘도하’의 의미를 만약 도성 내로 본다면 사비도성에는 만여 가에 대략 5만 명 내외의 인구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주서』 등에 의하면 사비도성은 5부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5부의 구체적인 위치나 구획 양상을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관북리 지점에서 폭 8.9m의 남북 대로와 폭 3.9m의 남북소로 및 동서 소로에 의하여 구획되는 한 블록의 크기가 남북 103m, 동서 86m로 나온다. 각 도로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면 남북 113.1m, 동서 95.5m 크기의 장방형 구획을 설정할 수 있으며 도성 내부 공간 구획의 기초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다만 구획 설정이 천도 초기부터 적용된 것인지, 아니면 도성 구획에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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